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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 이론

* 멜리사 그레그, 그레고리 시그워스 편저, 최성희, 김지영, 박혜정 옮김, 정동 이론 The Affect Theory Reader, 갈무리, 2015. 


"우리가 습관을 통해 좋은 취향을 획득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대상과 정동 사이의 연합(association, 아마 영미 경험 심리학에서 일컫는 '연상'을 이렇게 번역한 듯-오리너구리)이 습관을 통해 보존되는 것이다."(67)

"폭력을 노출하는 것이 폭력의 기원이 된다."(75)

- 사라 아메드, "행복한 대상".


"'몸의 활성화된 살의 차원에서, 즉 되기가 진행되는 몸의 차원에서, 오류가 결코 있을 수 없는 경보의 옳음이라는 차원에서 우리가 가정해야 하는 그 몸의 실존적인 효과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위험을 알리는 기호들이 영원히 어른거리는 세계로 영속적으로 신경을 자극받아 거듭 깨어나는 몸의 실존적 효과는? 한번 위협이면 영원히 위협인 세계의 실존적 효과는? 무한히 계속 이어지는 잠재-위협이 실제 경험으로 만들어지면서 되기의 잉여가 발생하는 것, 이 모두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세계?"(123)

- 브라이언 마수미, "정동적 사실의 미래적 탄생: 위협의 정치적 존재론".


"정신은 극악한 장면 앞에서 팽창한다."(148)

- 엘스페스 프로빈, "수치의 쓰기(Writing Shame)".


"경멸은 상대방을 밀어내기 위해서, 그리고 동시에 파멸시키기 위해서 작동한다."(216)

"적어도 어떤 시각에서는, 사회 갈등은 취향을 통한, 취향에 관한, 취향 속에서의 갈등이다. 그러나 만약 이런 진술이 '나쁜 취향'을 풍긴다면, 또는 절박한 경제적 생존 문제를 미학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능숙한 말솜씨로 들린다면, 많은 형태의 대중민주주의도 같은 식의 경멸을 받는 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219)

"베이트슨은 에토스가 교육(감각과 정동, 미각적 삶을 편성하는 훈련)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는 에토스를 바꾸는 것 또한 감각적, 정동적 교육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인도 레스토랑은 언제나 감각적 교육의 장이 된다. 분통함이 그 손님을 자극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 손님은 배우는 중일 수도 있다. 가능한 한 빨리 감각을 재편성하고 싶어 하는 엄격한 독학자일 수도 있는 것이다."(232-233)

- 벤 하이모어, "뒷맛이 씁슬한: 정동과 음식, 그리고 사회 미학".

+ 이 글은 로렌 벌렌트의 "잔혹한 낙관주의", 브라이언 마수미의 "정동적 사실의 미래적 탄생"과 함께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글 중 하나다. 특히 벌렌트가 존 애쉬베리의 시, 찰스 존슨과 제프 라이먼의 소설 등 동시대 작품들의 예리한 해석과 분석을 통해 '낙관주의'라는 부서지기 쉬운 가상의 위태로운 순간들을 짚어내고 있다면, 그리고 마수미가 9/11 이후의 일상적 위협의 논리가 은밀히 가정하고 있는 잠재적 위협의 미래적 확실성을 시의적절하고도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다면, 하이모어는 풍부하고 깊은 미학적, 철학적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하나의 사회 미학적 관점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그러나 하이모어의 이 같은 훈훈한 희망적 결론이 오래된 다원문화주의적 이상(理想) 이상(以上)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하이모어는 '정동 이론'이라는 유행하는 담론으로 지긋지긋한 다원문화주의를 옹호하는 또다른 통로를 계발하고 있다고 비판 받을 수도 있다. 


"붉은 배는 정동이 형식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정동은 상태들 사이의 전이이다(가타리 1996, 158)."(248)

"...최악의 반동적인 상황일지라도 정동적 강도가 아직 우리에게 도달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가정해볼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동은 때로 실험실에 묶여 전기 충격을 받고 나서 한낱 침샘 기능(그리고 "실험 신경증"이라고 불리게 된 것)으로만 축소되는 파블로프의 개와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정동은 탈출한다(마수미 2002, 35)... 감정이나 느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정치와 그 외 영역에서 정동적 사건의 확장된 역동성을 놓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애초부터 (마수미가 말했듯이) '감정과 정동은 다른 논리를 따른다.' 정동의 논리는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심리학적 범주'에 따르지 않는다(마수미 2002, 27). 게다가 감정은 '제한적인 강도'인 반면 정동은 '무제한적인 강도'이다. '그 차이점을 이론화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28). 둘 다 정동에서 감정이나 느낌으로 자연적으로 진행되거나 필수적으로 진전되는 것은 아니다. 들뢰즈는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에 대한 그의 글에서 이를 분명히 했다. 들뢰즈는 심지어 베이컨의 작품에서 (아마도 다른 데서도) '느낌이란 없다. 정동, 즉 '감각'과 '본능'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했다(들뢰즈 2005, 29). 요약하자면, 우리는 리토르넬로와 '정동적 조정'이 작동하도록 하기 위해 붉은 배, 난민, 세계무역센터, 비행기와 관련하여 어떤 감정도 느낄 필요가 없다. 오히려 이러한 사건들은 우리를 둔감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사건들은 여전히 감각과 직감의 재편성을 통해 행동하면서 우리에게 힘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우리에게서 힘을 빼앗기도 한다. 우리가 만일 일상생활 속에서 미시-파시즘을 실행한다면(푸코 재인용, 들뢰즈와 가타리 1983, ⅹⅲ), 이것은 감각의 통로를 통한 것이기에, 느낌이 있든 없든, 동의나 반대가 있거나 없거나, 이 모두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252-253)

"나는 내가 붉은 배와 국경 통제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고 느낀다."(255)

"'준거를 회전시키면서', 리토르넬로는 '존재의 느낌(감각 정동)뿐 아니라 능동적인 존재 방식(문제적 정동) 또한' 제공한다(가타리 1996, 167). 이러한 능동적 존재 방식과 관련한 윤리적 문제는, '어떻게 집단적인 너그러움을 창조하려는 욕망을, 대규모로 만들어 낼 수 있는가?'(가타리 1995b, 24)이다... 이러한 접촉의 윤리는 정동적 역량의 일상적 무한성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정도에 달려 있다. 이러한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국가, 정치, 심지어 학제적 분석은 정동적 힘이 문화적 성숙이나 심지어 건전한 비판의 탈을 쓴 '유아적 주관성'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여긴다."(267)

- 론 버텔슨, 앤드루 머피, "일상의 무한성과 힘의 윤리: 정동과 리토르넬로에 대한 가타리의 분석".

+ 이 글은 2001년, 9/11 사건이 나기 몇 주 전 호주에서 벌어진 탐파 호 사건과 이후의 정동적 파장에 관한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며 내내 세월호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 글이 붉은 배가 떠 있는 푸른 바다의 이미지--TV에 반복적으로 비친 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정동에서 시작하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그 이미지의 리토르넬로는 한층 불길한 세월호의 그것을 떠올린다. 회색 바다에 옆으로 누운 채 가라앉아가는 선체의 이미지. 배 주변은 놀랍도록 고요하고 이 이미지를 촬영했을 헬기인지에서 간섭해들어간 우웅- 하는 기계음이 쉬지 않고 들려온다. 이 장면을 못 해도 수십 번은 뉴스의 보도자료로 보았을 것이다. 흐린 하늘 아래 앓아 누운 커다란 동물처럼 물 속에 반쯤 잠겨 기력이 없는 선체 안에 봉인된 아우성. 이 이미지가 거쳐온 분석과 비평과 인상의 변전. 옅어지는 대신 점점 부풀어오르는 정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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