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정말 락 페스티벌과는 인연이 없는 것일까? 1999년, 내로라하는 뮤지션들이 내한한다는 트라이포트 락 페스티벌에 3박 4일의 일정을 투여하기로 결정했던 좀 ‘놀 줄 아는’ 음악 애호가들의 모처럼의 기대가 빗물에 휩쓸려갔던 데다, 이름을 살짝 바꾼 올해의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마저 폭우 속에서 치러졌다는 가공할 노릇을 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 좁은 반도는 비바람의 여신에게 저주를 받았는가, 아니면 관능적인 물속에서 지랄할 수 있도록 디오니소스의 은총을 받았는가?
사실상 ’99년, 우리는 후지 락 페스티벌을 위해 몸소 동북아에 오신 비싼 밴드들이 ‘몸 좀 푸는 셈’ 치고 트라이포트를 방문해주신 것에 대해서도 감지덕지하는 마음가짐으로 진흙 펄의 다이브를 감행했었더랬다. 거기에 비하면 7년 만에 열린 펜타포트는 역시 빗속에서 치러지기는 했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좀 다르다. 우선 ‘락 페스티벌’이라는 타이틀을 달고서도 지나치게 장르의 유행을 반영한다는 약간 괘씸한 라인업(블랙아이드피스라니!), 그러나 텐트가 물에 떠다니던 홍수 사태로 1박 후 철수해야 했던 트라이포트와는 달리 펜타포트에서의 폭우는 (주최 측의 단단한 대비로) 그럭저럭 이재민 없는 ‘광란의 축제’로 화했다는 후문. (하지만 안상수 시장의 관람 기사는 역시 좀 깬다.)
따지고 보면 1969년 미국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사랑의 여름’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마약, 히피차림, 섹스가 난무하는 ‘자유’의 이미지를 미국 젊은이들의 가슴에 아로새긴 후, 기껏해야 나팔바지와 통기타, 생맥주가 ‘자유’인 한국 젊은이들이 이 ‘자유’의 협소함에 대해 막연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일 게다. 걸핏하면 ‘딴따라’들의 대마초 사건으로 ‘요즘 젊은이들의 해이한 정신’을 문제삼는 게 버릇이 된 유신-군사정권 하의 제3세계 개발도상국에서 그 ‘자유의 이미지’의 크기가 문화적인 나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즉각 이해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아무튼 요즘 내한공연을 해본 해외 뮤지션들은 “요즘은 세계 어딜 가도 한국 관중처럼 열광적인 팬들이 없다”고 좋아한다는데 결코 거짓말은 아니다. 1998년 첫 내한공연을 열었던 메탈리카는 공연 첫날, 어두운 관중석에서 별처럼 수없이 반짝이는 라이터 불빛들을 보고, 그 창의적인 아름다움에 놀라 좀처럼 하지 않는 즉흥곡 연주를 감행했다. 그것이 야간정치집회에서 다져진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겠지만 말이다.
나와 당신의 이상한 노스탤지어
아무튼 ’90년대 말을 끝으로 운동권이면서 음악애호가인 젊은이들의 집단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운동권이 대중음악 따위에 환호한다(“김광석이라면 모를까 메탈리카라니!”)는 게 죄악시되던 어떤 시절을 생각한다면 그런 짧은 시절에 향수를 느끼는 것도 딴엔 이상한 일이다.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격변을 겪는 이런 나라에서만 느낄 수 있는 향수인 것이다.
하지만 시위문화-군대문화-공연문화의 상동성이 여기에서 끝난 것일까?
2002년, 월드컵이 끝난 지 한 달 쯤 지났을 때 올림픽공원 야외 경기장에서 열린 레드핫칠리페퍼스의 공연에는 아직 식지 않은 공동체적 감흥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었다. 오프닝밴드로 참여한 크래쉬, 크라잉넛, 노브레인 등의 국내 밴드들의 연주가 끝나고 월드컵 문화영웅 윤도현밴드가 무대에 등장하자 스탠딩 관중은 더러 야유를 내뱉기도 했지만, 윤도현이 마이크를 잡고 “대애한민국”이라는 짧은 주술을 한번 외치자마자 관중은 마치 마술에 걸린 듯 멍한 표정으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윤도현밴드의 공연 후 등장한 미국 밴드 제인스어딕션이 이것을 따라 하고, 관중이 또다시 어김없이 최면에 들어간 것은, 물론 약간의 에티켓이기도 했겠지만, 거기에서 어떤 도취감을 느꼈던 것만은 사실이리라. 그러니까, 이제 구호와 집단적 감흥은 저항적인 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고, 월드컵 문화영웅 윤도현과 정치영웅 노무현을 낳은 “대애한민국”에 문화적으로 공감할 수만 있으면, 역설적으로 누구나 ‘진보적’일 수 있다는 벅찬 환상을 실현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서구의 페스티벌들이 대체로 얌전해진 것은 절박하게 싸울 정치적인 저항의식도, 격변하는 정치적 지평 위에서만 공감할 수 있는 공동체적 감수성도 사라졌기 때문인가?
얌전한 주신제와 테크놀로지
그 같은 사정은 정치적인 격변의 사멸에만 관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관중의 고요한 청취와 사색적인 관람이 서구 락 신의 주된 장면이 된 것은 대중음악계에서 헤비메탈과 하드락의 퇴조와도 관련되어 있겠지만 인터넷에서의 공공연한 P2P 공유체계와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MP3 음악파일의 공유는 무한한 ‘소리바다’로의 접근을 가능하게 한 후 한 곡 한 곡에 대한 가치를 하향 평준화시켜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식의, 대가를 지불해야만 그만한 애정이 지속된다는, 성서에도 명시되어 있는 법칙에 위배되기도 하거니와, 저하된 음질로 멜로디와 주요 악기라인, 보컬 이외의 모든 잡소리를 지워버리는 얄팍한 테크놀로지를 통해 음악이 ‘향유 대상’이 아니라 ‘생활 속의 배경음악’으로 변해버린 감상 태도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이제 어지간한 음악은 레코드점을 뒤지러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지 않아도 손쉽게 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음악에 있어서만은 최소한의 공산주의가 이루어진 셈인가? 아니, 내가 지금 뭘 의심하고 있지? MP3로 음악을 듣는 이들은 진정한 음악 애호가가 아니란 말인가? 그러니까 지금 필자가 쓰고 있는 이 말은, 자본주의 논리 하에서만 음악이 제대로 향유될 수 있다는 개소리인가?
사족은 이쯤 해두고 본격적인 논의는 후일을 기약하자. 일단 해두고 넘어갈 말은 공유 프로그램 개발자들이 공산주의자는 아니며 따라서 자율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자본의 사적 소유를 부정하는 정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결과적으로 MP3의 공유가 음반 산업을 어느 정도 약화시킨다 하더라도 음악 자체의 가치는 절하하는 장기적인 악영향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처럼 음악 자체의 가치를 절하하는 MP3의 공유가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IT 강국 대한민국에서 그 어느 곳보다도 열광적인 젊은 콘서트 팬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필자의 논지와는 정반대된다는 점이다. 이 사례는 무엇을 이야기해주는가? MP3는 열광적인 음악 애호가를 낳는다? 아니, 그보다는 그러한 상황 자체가 말해주는 한국의 편향적인 음악산업의 현실이 있다. 그러니까 P2P를 통한 음악파일 공유가 한국에서는 ‘돈 아까우니 공짜로 듣자’는 빈대 심리 이전에 음악 소스의 결핍을 보완하는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주말 가요 순위 프로그램과 라디오를 통해 가요가 소비되고 있는 데 반해, 유명 케이블 방송에서조차 그다지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서구 컨템퍼러리 락은 약간의 매스 미디어와 상당한 양의 P2P 경로를 통해 향유되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P2P는 음악적으로 정보 제공의 역할이 강한 셈이다. 이렇게 ‘주워들을’ 여건만 되고 향유할 공간은 한정된 곳에서 유명 서구 컨템퍼러리 뮤지션의 콘서트라도 한번 열린다고 생각해보라! 많든 적든 실감을 느끼려는 필사적인 팬들이 모여들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환영은 환영이다, 그래도 즐겁지?’
유명 락 뮤지션들의 콘서트나 락 페스티벌이 우리처럼 간헐적인 행사가 아닌 유럽과 미주 지역에서는 침잠하고 있는 관중을 일깨우거나 뮤지션의 ‘실제 모습’에 대한 환상의 퇴조를 반성적으로 내면화하는 시도들이 생겨나고 있다. 지난 호에 잠시 소개했었던 고릴라즈의 경우를 살펴보자. 고릴라즈는 가상의 캐릭터들로 구성된 사상 최초의 카툰 밴드로 영국 모던락 특유의 감성적인 분위기와 세련된 샘플링, 그리고 블러(Blur)의 데이먼 앨번의 나른한 목소리로 데뷔 5년 차에 그래미상을 수상한 성공한 프로젝트다. 이(것)들은 콘서트장에서 영화관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사람은 스크린 뒤에 숨어 연주를 하고 실제로 보이는 것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들이기 때문에 이들의 콘서트만큼 뮤지션에 대한 환상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물론, 이 ‘환상이 환상’임을 표면화하는 전략 뒤에는 사람들이 더 이상 주신제에서 고양이 피를 짜내는 오지 오스본이나 기타를 깨부수는 20세기 식 퍼포먼스가 아니라, 약간은 지적이고 약간은 예술적이며 또 약간은 기괴한 오락거리를 보기 원한다는 시대적 감성에 대한 적확한 이해가 있다. 사람들은 안전한 기괴함을, 거대한 저항이나 억눌린 감정의 분출보다는 적당히 침잠해 있는 우울에 대한 읊조림을, 그 이유 없음에 대한 담담한 고백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의 분노보다도 깊기만 한 슬픔의 절제를 보고 싶어한다는 판단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대전 이후 한동안 사르트르 식 실존주의가 들어맞는 시대가 있었다면 오히려 지금은 바닥 없는 공허감으로 서서히 진무르고 있는 까뮈 식 실존주의의 시대인지도 모른다. 일찌감치 인간 실존의 공허란, 아무리 다양한 방식으로 까불어봤자 도취하든가, 스스로를 기만하든가, 바윗덩어리를 밀어 올리며 사는 세 가지 말고는 선택지가 없다고 한, 그 까뮈 식의 실존주의 말이다.
그러나 이런 까뮈 식 실존주의와 기술주의의 만남이 행복한 것인지는 아직 미지수다. 최종적으로 꿈꾸는 것은 따뜻한 해변에서의 평온한 일광욕이면서 우선 쫓아내야 하는 것이 그 자신의 마음속에 똬리를 튼 공허일 때, 뉴욕의 거대 건물이 날아가든 전쟁이 일어나든 그 모든 것이 마음속의 뒤틀린 심사보다 충격적으로 여겨지지 않을 때,
사람들은 무언가를 때려부수고픈, 피를 보고픈 충동마저도 저기 침잠한 당의정 같은 우울로 가라앉히고 ‘나에게 프로작을! 나에게 프로작을!’ 하고 외치고 있으니,,
‘머드스탁’의 진흙탕 속에서도 3박 4일간 완전히 지랄할 수 있는 어느 주변 국가의 음악 팬들은 진정 아직은 자기의 늪에 빠진 지나치게 성숙한 정신에 속한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