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 비밀이라는 작은 왕국에 일곱 백성이 살고 있었다
유난히 비밀이 많던 거짓말여왕, 일곱 백성을 너무 사랑하지만
비밀을 감추기 위해 그들을 모두 사형할 것을 명령했고......
이것은 두더지 서기관이 비밀리에 옮겨적은
일곱 백성들의 유언장
귀머거리 시인 고독에 대한 풍문이 들려오면 마을 언덕에 모닥불을 피워주세요, 흉가에서 들썩이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보고 싶어요.
어린이
일기를 쓰는 것은 숙제였으므로 일기장에는 엄마가 불러주는 대로 받아적었어, 엄마가 죽으면 염소에게 일기장을 먹여야지.
(엄마에게는 비밀인데요 나는 시도 쓸 줄 알아요. 어제도 꿈속에서 엄마가 죽는 시를 썼다구요.)
소심한 혁명가 모두 각자의 리듬으로......
쌍둥이 심장 너와 나의 경계에서 잠들고 싶다 그것은 너도 되고 나도 되는 것. 열렬한 왼편 냉담한 오른편. 웃음이 울음처럼 터지려고 합니다.
원더보이 알바 간신히 스물다섯번째 스테이지. 동전 몇 푼에 원더보이 노릇도 지긋지긋하군. 좀처럼 판은 깨지지 않고, 빌어먹을 못생긴 공주는 어디에 있길래.
왜 당신의 전략은 늘 그 모양입니까 지겨워 죽겠습니다.
첫
내가 얼마나 서툴렀습니다. 오늘은 어제를 입은 내일과도 같아서 늘상 처음하는 인사입니다.
그리고 나, 두더지 나의 진실은 거짓말이에요 당신께 진실해지는 순간 나는 거짓이 되어버리죠. 나의 엄마 거짓말여왕은 내가 왕국에서 가장 진지한 서기관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달라요 나는 왕국에서 거짓말을 가장 잘하는 시인입니다.
백성들을 죽이고 왕국에 홀로 남은 거짓말여왕
너무 심심한 나머지 거짓말 놀이를 시작했다
자신은 여왕이 아니라는 거짓말을 하고
여왕이 아니라는 사실은 사실이 아니라는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이 거짓발을 낳고 또 거짓말을 낳고......
결국 자신이 여왕인지 아닌지 헷갈려 광기에 사로잡혀
영원히 비밀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 모든 비밀을 기록하고 있는 나,
그러니까 나는...... 누구일까
* 소설부문의 신인상 등단작, 이상우의 "중추완월"도 괜찮았다. 일종의 느와르인데 문장이 탄탄하다.
* 계간지에 실리는 장편연재는 읽기 힘들다. 그러려면 매 계절 찾아 읽어야 하는데, 석달쯤 지난 후엔 이미 이야기가 머리속에서 휘발되어 있는 거다. 기억력이 좋은 독자들은 모르겠으나, 문예지에 장편을 연재하는 것은 사실 효율이 좀 떨어진다고 생각. 지면은 엄청 많고 읽는 사람은 적다.
* 단편 중에서는 손보미의 "폭우"가 다소 인상적.
* 신작시편들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김경미의 "모던의 속도".
* 서영채 선생의 "'나가수'를 통해 본 노래와 이야기, 괴물 시대의 메타 서사"는 지금 거의 공백 상태에 있는 대중문화비평에 격을 더한 맛깔나는 글이다. 세태가 외양이라면, 일정 세태를 지속적으로 생산해내는 메커니즘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하였다. '나가수' 현상이 노래와 이야기라는 주제와 그럴듯한 접점을 형성하고 있고 이것이 설득력이 있는 것은 순전히 글쓴이의 통찰 때문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부분들;
어떤 세상에 메타 서사가 넘쳐난다면, 그것은 그 세계의 상징질서의 어두운 기원이 노출될 위기에 처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압도적 힘을 소유한 지배자는 너그럽다. 그에게는 이데올로기 공세 같은 것은 필요 없다. 많은 역사적 사례들이 보여주듯이, 지배 세력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난푝해지거나 폭력을 동원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지배력이 약해졌거나 자신의 정신적 헤게모니가 힘을 잃었을 때이다. (468)
이야기는 경계 면이 만들어내는 정보의 비대칭성에서 생겨난다. 한 사람은 보았거나 느꼈고, 다른 사람은 그러지 못했다. 이야기는 그런 두 사람 사이에서 시작된다...노래는 어떻게 시작되는 것일까. 이야기는 대화적인 것이지만 노래는 기본적으로 독백적이다. 혼자 이야기하는 사람은 이상하지만, 노래는 혼자 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서정의 흐름을 만드는 경계와 낙차는, 그것이 어떤 것이건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 해도 좋겠다. 즉 서정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힘이란, 주체의 내부로 들어와버린 어떤 외부적인 것에 의해, 즉 자기 자신과의 불일치와 간극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라 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내부화된 외부성을, 시간적인 것도 공간적인 것도 아닌 것으로서, 절대적 외부성이라 칭할 수 있지 않을까. (469)
새로운 시대는 괴물의 시대라 불러도 좋겠다. 속물은 위선적이지만 그래도 예의와 염치를 아는 존재이고, 자신의 속물성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속물성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속물, 위선의 외피조차 필요로 하지 않는, 예술은 물론이고 교양조차 거부해버린 속물, 그것은 이미 속물이 아니라 괴물의 차원에 있다.//괴물은 이야기는 알아도 노래는 알 수가 없다. 수치를 모르는 존재에게 자기와의 간극이나 절대적 외부성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470)
* 나인호의 "역사 서사를 재고함"도 읽을 만했다. 팩트, 픽션, 팩션의 문제를 끝내 '꿈'의 기록과 해석으로 몰고 가는 것은 나름 설득력 있었다. "역사 인식론적"인 문제의식이나 역사가의 작업을 "상상력의 다이어트"라 표현한 것 참 마음에 듬.
* 한민희의 "불가능성과 형상"도 괜찮았다. 하이데거 식의 침묵과 말의 신비한 꼬리물기에 너무 신들려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다음과 같은 궁극적인 물음에 집중하는 태도가 진지해서 좋았다;
말 못 할 공포로 언어를 잃어버린 것은 어떻게 그 존재를 드러낼 수 있을까? 즉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언어의 형상화가, 그것이 문자의 형상이든 구전되는 것이든 동굴에 그려진 암각화의 형상이든, '언어'로 화현 가능한 것만이 그 존재를 형상화하여 드러낼 수 있다면 그것이 될 수 없는 불가능성의 존재의 화현은, 존재의 드러남은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은 것일까? [...] 직접 겪은 일을 증언하는 것이 그것을 겪지 않은 제삼자가 그 일에 대해 쓰거나 영상물로 제작하는 것보다 더 '진실'하며 더 '진리'에 가까운가? (504-5)
이 글은 히로시마 생존자인 오타 요코의 "시체들의 도시"라는 글을 텍스트로 삼고 있는데 극심한 고통은 오히려 말을 잃게 한다는 잔혹한 진실을 재확인하게 해준다;
극도의 공포로 공포조차 느끼지 못하고 두려워할 수조차 없었던 그들은 그날 이후 이삼 전이 지날 때까지 그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강변에 모인 사람들은 아무런 인간의 감정을 보이지도 않고 무표정했으며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인간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만큼만 상상할 수 있으며 두려워할 수 있는 만큼만 두려워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공포'가 무서움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무서움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무섭게 하여 그 자리에 못 박아 포획하고 죽어가게 한다...(509-10)
* 하지만 특집 글들 중에서도 백미는 전대호의 "이야기와 시간과 과학"이었다. 그는 '말'과 '눈'을 맞세우고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으로 시작한다.
'어떻게 말이 눈을 품는가?' 똑같은 질문을 칸트는 이렇게 표현했다. '어떻게 선험적 종합판단이 가능한가?' (520)
말과 눈의 문제를 칸트적인 문제의식으로 변환하는 능력도 대단하지만, "통각의 통일"을 "요컨대 모든 비밀의 거처는 '나'다"(522)라고 번역하는 내공은 굉장하다. 다음과 같은 언명들의 시적인 울림은 꼭 적어두어야겠다.
꽃(이야기)에 윤곽(플롯)을 둘러라. 꽃은 한사코 피어나 그 윤곽 바깥으로 나갈 것이다. (527)
훌륭한 이야기 작품은 사람의 죽음처럼 애틋하다. (528)
그리고, 이어 등장하는 과학과 서사의 문제.
과학적 모형은 완결, 귀환, 실체의 편이며, 이 사실은 수학 증명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수학 증명도 문장들의 연쇄이므로 겉보기에는 이야기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확고한 귀환 구조가 수학 증명을 유별나게 만든다. (533)
어떤 반복 강박은 완전무결한 과학적 진리에 대한 갈망일까?
* 그리고 미셸 우엘벡. <지도와 영토>의 앞 부분 번역을 읽고 나니 맹렬하게 작품 전체를 보고 싶은데, 나는 바빠야 한다... 대중과 상업과 예술과 예술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 그림 그리는 동생에게 추천해주었다. 이재룡 선생의 작가론은 매우 충실했고 재미도 있었다.
* 사족 : 순전히 독자 입장에서, 문예지들이 비평보다는 작품을 더 많이 실어주었으면...하는 작은 소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