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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수수께끼

실비아 수수께끼


이진희

실비아
실비아이기도 하고 실비아가 아니기도 한
모든 실비아
혹은 어떤 특별한 실비아

이기적이고 싶은 실비아
착하구나 장하다 칭찬받고 싶은 실비아
날마다 자기를 부정하는 실비아 그래서 자신을
어느 날은 소녀라고 어느 날은 소년이라고 틀림없이 믿는 실비아
어느 날은 아무 것도 아닌 먼지였다가 쓰레기였다가
어느 날은 전능하기 짝이 없는 실비아가 되고 싶은 실비아
죽도록 살고 싶은 실비아 그래서
사는 게 헌신짝 같은 실비아
차라리 미쳐버렸으면 하는 아름다운 실비아
새카맣게 응혈진 피의 매듭*을 끊어버릴까 말까
고민하는, 고민을 커피처럼 즐기는 실비아
시를 쓰고 싶지만
훌륭한 시를 쓰고 싶지만
쓰고 싶은 시를 쓰지 못하는 실비아
쓰고 싶은 시가 어떤 건지 모르는 실비아
다만 쪼글쪼글 늙어가는 실비아
쿠키를 굽지 않는
구운 쿠키를 먹일 아이를 낳지 않은 실비아
무엇이 실비아를 머뭇거리는 실비아로 망쳤을까
실비아가 망치는 실비아
망가진 실비아가 복원하려고 애쓰는 실비아
망가진 실비아를 복원하려고 애쓰는 실비아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실비아
한참 어리고 한참 늙은 실비아
한참 착하고 한참 나쁜 실비아
가스 오븐을 분실한 실비아
일부러 분실하고 일부러 살아가는 실비아
혼자 처박혀 있을 때 세상과 함께하는 실비아

끝나지 않을
실비아 수수께끼
언젠가는 끝내야만 할, 끝내고 싶은
실비아 수수께끼

*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중에서

- <현대시> 2011년 10월 

 

 

자꾸 읽다 보니 "실비아"가 "實非我", 혹은 "失非我"처럼 읽힌다. 반복으로부터. 어떤 이름을 계속 부르다가 이 이름이 '나'이기도, '나 아닌 것'이기도 한 어떤 것이 될 때. 죽지 않고 '나'로 죽은 채 살아 있는 실비아. 시인은 선대의 시인을 살고, 죽고 싶었던, 죽고 싶지 않았던, 사는 듯이 살고 싶어 죽음 같지 않은 죽음을 산, 누구나 알지만 정말로 공명하기 힘든 먼저 죽은 시인의 이름을 귀모(鬼母)라도 되는 듯 제 안에 불러들인다. 죽음의 주이상스를 향한 실비아 플라스의 독하고도 질긴 충동은 성공하는 순간 실패하지만, 실패하는 동시에 성공해버리고, 오, 그러나 이 멋진 앙갚음('나'를 향한? 세계를 향한?)은 언제나 올인하는 자의 것. 그/녀의 눈빛은 파토스로 심하게 흔들리고 입술은 바짝바짝 타들어가므로, 다 들켜버리는 도박을 그/녀는 멈추지 않는다. '의미 없는 나머지 삶'이라는 판돈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死神은 그토록 불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자에게 가장 먼저 다가와 돌이킬 수 없는 질문을 던져버린다. "너는 어차피 다 잃기로 결심한 게임을 하고 있다. 그 결심이 정말로 공고한가? 이래도? 이래도?" 이 질문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으므로, 이 게임의 승패는 알려지지 않는다. 게임의 룰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게임에 임하는 자가 판돈을 올인하고자 하는 불가사의한 요구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 게임은 정말 누구나 알고 있던 그 게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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