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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tender

천년왕국에서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그러니까, 1991년 늦가을, 아직 종로에 종로서적이 있었을 때였다. 나는 막 고교 2학년 진학을 앞두고 본격적인 문청 행세를 시작하고 있었고, 그에 걸맞은 허세를 완성해줄 책 한 권을 사게 되었다한 영문학자가 엮은 포스트모더니즘과 한국문학: 후기산업사회의 문학적 대응이라는 이 한 권의 책은, 정말이지 알 듯 모를 듯한 소리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등하교 시간의 버스 속에서 여드름투성이 안경잡이 고등학생의 자긍심을 키워주기에는 그만인 제목을 달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저 옛날 고교 비평준화 시절,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1급 문예지였다는 <학원>지라든지, 선배들이 교류했던 내로라하는 공립 고등학교 문예반들에서 오랜 세월 보내온 교지들, 70-80년대 문학잡지와 시, 소설 등으로 가득 차 있었던 문예반실 책장은 이미 졸업해버린 선배들의 엘리트주의적인 추억와 함께 계통 없이 쌓여있는 국문학 연구 대상 텍스트들의 카타콤 같은 곳이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몇 년 전 다시 찾아간 모교의 문예반실 책장은 담당 교사가 10여 년 전 헌책방에 헌납해버려 이미 그 역사성을 잃어버린 후였다.) 이 어둡고 습기 차고 곰팡내 나는 소굴에 필사적으로 적응하고 있었던 나는 이미 탈출하기에는 너무 늦어있었던 바, 나 자신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었던 어둠과 습기와 곰팡내 때문에 그것을 정당화할 제도 속의 어떤 일탈적이고 예외적인 공간으로서 그곳에 남아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화장실에 갈 때에도 선배에게 90도로 인사를 해야 했던 그 전근대적인 공간에서, 나는 축제가 끝나고 겨울방학이 올 때까지, 혼자 있을 때마다 알 수 없는 개념들로 도배된, 거의 SF에 가까운 느낌을 주는 이 난삽한 책을 읽었는데(하지만 지식이 전무했던 희곡에 관한 마지막 장만큼은, 좋아하는 시인이 쓴 글마저도 거의 읽어낼 수가 없었다), 비록 80년대의 그늘 속에서이긴 하지만, 내가 즐기는 작품들이 저 알쏭달쏭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례라는 주장들을 읽으면서, 뭔지 모르겠는미래로 탈출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졸업하면서 문예반실 책장에 두고 나온 그 책은 절판된 지 오래여서, 최근 몇 년 동안 다시 구하려다 실패하고, 얼마 전에야 온라인 중고서점에서 정가보다 비싼 값을 치르고 획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받아든 나는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과거의 실제 앞에서 한동안 얼얼한 기분에 휩싸여야만 했다. 나는 이 책의 편집자가 그로부터 10여 년쯤 후에는 국문학 연구에서 압도적인 인용 저자 목록에 오르게 되는 포스트콜로니얼 연구의 대부인 한 학자의 지도 아래 있었다는 사실과, 머리말의 겸허한 결심이 포스트모더니즘을 말하는 자상대주의자, 후기자본주의 싸구려 상업주의자, 쉽게 말해 오늘날의 용어로 진정성을 배반한 자에 대한 세간의 편견에 대한 검열과 방어의 표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브레히트, 프레드릭 제임슨, 김윤식, 백낙청을 차례로 인용하며 시작하는 서론에는 민족민중계열 진영과 자유주의계열 사이에 국내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 대한 논쟁이 현재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서구에서는 이제 당연한 용어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이 용어에 대응하는 사례가 실제로 우리 문학 속에 있는지’, 그 쟁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궁극적으로 척박한 우리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리얼리즘또는 서로간의 어울림과 길트기를 가능케 할 중간문학을 주창하고자 한다고 쓰여 있었으니, 여전히 오래된 한국문학의 특수성속에서, 즉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정글 깊숙한 그늘에서 포스트모더니즘3의 길의 후보로 간주하기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학 연구에서 흔히 그렇듯, 외삽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적용하고자 하는 자는 현실 속의 많은 사례들을 귀납적으로 검증하고 우선 그 형식적인 특징들이 이 패러다임에 적합한지를 조사한다. 김윤식은 조심스럽게 한국에는 아직 포스트모더니즘이 도착하지 않았으며 이인성 정도가 그 조짐을 보여주고 있다고 썼지만, 많은 필자들은 이미 그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패러디, 패스티쉬, 메타픽션, 해체 등의 형식적 특징들을 간신히 지칭하는 용어들이 시쳇말로 가장 핫한 신상 아이템으로 전시되어 있는 이 91년의 진열장에서는 60년대 블룸의 상호주관성마저 포스트모더니즘의 징조로 여겨졌으며, 30년대의 이상에서 시작하여 황지우, 최승자, 최승호, 박남철, 이성복, 장정일, 이인성, 하일지 등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당대의 문제작들이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책에 의하면, (그리고 이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김춘수에 의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리플리 뱃속의 에일리언처럼 이미 식민지 모더니즘 시절부터 자라고 있다가 이제 막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던 것이다.


10년쯤 후에는 한국 시의 모더니티를 규명하기 위해 동원될 도시 시라든가 일상성같은 인기 있는 주제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개념 하에 소집되어 있었던 것은 차치하고, ‘쌔끈한젊은 작가의 작품들이 쌔끈한담론의 그릇에 담기게 마련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란 것은 아니다. 대학에 진학한 뒤 본격적으로 접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흉흉하고도 화려한 소문은 분분한 찬반양론과 함께 이미 문화연구나 문학비평 등 기초 학문의 주변을 접수한 후였고, 존경하던 선배는 잡지 최신호에 실린 데리다의 번역을 복사해서 건네주는 존경스러운 방식으로 나의 존경에 사의를 표했으며, 과방 책장에는 낡은 사회과학 서적들과 함께, 개설된 강의와는 관련이 없는 포스트모더니즘 관련 서적들이 뒹굴고 있었다. 마르크스-레닌은 알튀세르-그람시로 대체되는 중이었고, 푸코의 생정치를 생활정치로 가공하여 진보정치의 기치로 내걸기 시작한 사멸해가는 운동권에서는, 그 모든 것들이 전향과 수정과 진보의 혼돈스런 상호 규정 속에서 동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학에서도, 이미 도착해있다는 그 대단하신 포스트모더니즘은 예외적이고 일탈적인 제도의 주변과방이나 학회에서 자율학습에 맡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던-포스트모던의,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의 입장에서 내리고 있는 개념 규정들은 얼마나 심각하고도 조심스러웠던가! 나는 그것을 아직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같은 용어에 대한 각 논자들의 개념상의 차이를 다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그러나 더 중요하게는, 이제 그래도 별 상관없는 세계에 살게 된 것 같다는 것이다. 이 느낌은 마치 천년왕국에서 요한계시록의 구절들을 세세히 떠올려본다면 느끼게 될 어떤 가공할 느낌과도 같다; ‘저런, 이건 너무 과장되었는걸? 정치적으로 대단히 혼란한 해였는데 저런 한가한 생각을 하고 있었군? 하지만 아직 무한히 도착하고 있는 것처럼만 보이는 어떤 세계 속에서, 그 시절의 지식 장에서, 할 수 있는 말은 다한 모양이야! 그리고 말이야, 실은, 잘 생각해보면 그리 틀린 말도 아니지 뭔가. 그런데, 아무려나, 어떻게든 도착하게 되어 있었다면, 어째서 그에 관해 그렇게 많은 추측들을 쏟아내어야 했단 말인가?’


그러나 90년대 중반의, 학제 간 연구 같은 것이 아직 실재하지 않았던, “저기 말이야, 토론토대학에는 잡종학과라는 것이 있대. 거기에선 생물학과 문예이론을 접목시킨대.” “정말? 세상에 그런 일이? 재미는 있겠지만, 그런 프랑켄슈타인이 정말로 우리의 미래인가?” 이런 대화가 오고가던 보수적인 학제 속에서 전통철학의 진지함에 세뇌되고 있었던 나는, ‘모던이며 포스트모던같은 개념의 심각함과 중압감에 눌려 저 무서운 단어들을 작품 해석에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었던 한국문학의 현장 비평에 꽤 오랫동안 질려 있었던 것이다. 말세였고, 천년왕국은 부분적으로만 현실이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우리 모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 규정이나 한국에서의 적용 가능성 따위는 잊어버렸던 것 같다. 리얼리즘-모더니즘? 그게 뭐였지? 아마도 금융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갑자기 성업 중이던 클럽들이 문을 닫았고, 학부제와 함께 빈사 상태였던 학생 운동은 거의 숨을 거두었으며, 바타이유를 읽다가 유나바머 선언문으로 갈아탄 친구는 졸업을 두 달 앞두고 자퇴서를 냈고, 어학연수 특수를 누리던 밴쿠버는 IMF 여파로 지역 경제가 파탄에 이르렀다. 어딜 가나 들뢰즈의 노마드 개념이 유행 중이었지만, 그걸 당장 실현하려면 국제 거지가 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된 친구들이 여럿 있다. 그들 중 몇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마침 헌정 사상 처음으로 만년 제2당이었던 당의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는데, 이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필 최초의 공식적인 민주 정부 하에서, 파산 상태를 면하기 위해 사회는 급속도로 속물적이 되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돈 놓고 돈 먹기를 바라보면서 없는 사람은 너무 없어 아쉽기만 한 그런 날들이었다. IT? 거품. 노동 유연성? 고용불안. 386? 사교육 시장의 중추. “부자 되세요!” 염장 지르나?


아직 영혼이 남아있으면 영혼을 팔고, 영혼만으로 살려면 최대한 멋지게 그것을 미화해야만 하는, 체념과 좌절 속에서 강요된 자유. 마침 새 밀레니엄을 앞두고 열린 <2000년을 여는 젊은 작가 포럼>의 주제 논문집이 출간된다. 이 책에는 “21세기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역사적 사유를 본질론적으로 강요하는 질문이 제목으로 달렸다.


그렇기는 했지만, 91년에서 99년 사이보다, 99년에서 2015년 사이가 훨씬 가까운 듯하다. 아마도 인터넷의 유무가 그 거리를 결정했는지도 모른다. 이 책에 실린 어떤 예감들은 대부분 현실이 되었다. 91년에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로 명명되었던 바로 그 사람들의 예언대로 문학은 은둔했으며(황지우) ‘식물적이 되었고(이인성) 거의 쥐라기에 다다랐는데(최승호), 이 글들이 시대적으로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시작 지점에서 쓰여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포스트모더니즘에 우리가 다다랐는가, 그 증좌는 무엇인가 따위의 질문은 단 한 마디도 포함되지 않았다.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다. 세계는 무역 관계처럼 표면적으로 등질화되었고, 후기산업사회의 가능한 징후들을 모두 드러냈으며, 그 세계의 벌거벗은 바닥은 <매트릭스>, 주체의 분열은 <식스센스>가 보여주었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91년에 그리고 있었던 포스트모더니즘은 여직 사회과학중심주의의 반성적 연장 속에 있었고, 반성이라든가, 후기산업사회라든가, 대응 같은 어휘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오브제로 다루는 대상이었다. 새삼스럽지만, 냉전은 이제 정말로 끝난 것 같았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이제 이항 대립이 없는 무수한 다자(상품)들의 세계가 펼쳐져 있고, 이른바 거대한 수정궁’(슬로터다이크)으로서의 무적의 세계 자본주의라는 멈추지 않는 욕망의 체제가 그것을 보증한다고, 광고들이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보면 99년의 예측들에서는 어떤 한가함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 그것은 9`11, 3`11 등 국제적 재난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재난의 세월 이전이기 때문일 듯하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문학의 미래에 관해 이야기해야 할 지면에서 이따위 개인적인 회고벽을 펼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이것이, 언젠가 문학의 미래에 관한 과거 담론의 개인적 역사를 기억할 때 세 번째 사례가 될 수도 있을 텐데, 지금 우리가 다다라 있는 이 이상한 천년왕국에서 요한계시록의 뒷장에 있는 백지에 무언가를 써야 할 텐데, 나는 두렵게도,


그 많은 재난들이 닥쳐오기 직전에 내가 느꼈던 세기말의 권태에 관해 기억해야만 한다. 어디선가 9`11 직후에 드디어 할 말이 생긴 철학자들이 속으로 환호했다는 소문을 비아냥거리며 쓴 적이 있지만, 그 이야기를 쓸 때 나는 키보드를 두드리며 실제로 낄낄거렸던 것이다.


그 어떤 지리멸렬함이 우울증으로 전화하고 있었던 것은 나뿐이 아니었지 싶다. 그 갑갑함은 영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이고 연구자인 가브리엘 조지포비치가 What ever Happened to Modernism?의 서문에서 토로한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1958년 대학 신입생 시절, <오늘날의 영어권 소설> 수업에서 그는, 도서관에서 그의 존재의 핵심을 강타했던카프카나 프루스트를 대체할 위대한 작가들이 현실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수가 나누어준 수업계획서에 쓰여진 작가들의 작품은 재치 있고 영리했지만 그를 감동시킬 수 없었다. 그가 잘못된 것인가, 저들이 잘못된 것인가? 모더니즘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는 무척 노력한 끝에 그 감동의 목록에 보르헤스와 뮤리엘 스파크, 윌리엄 골딩 등 몇 명을 더 간신히 추가하기는 했지만,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나는 기억해야만 한다. 사실 나는 80년대 시인들이 이후에 펴낸 ()전향의 직간접적인 기록들을 실시간으로 접했을 때 분노에 치를 떨었고, 내가 받았던 감동들이 카드로 지은 집처럼 무너질 개념들로 구축되었다는 사실에 보상을 요구하고 싶은 심정으로 원망과 저주를 퍼부었는데, 그것은 그 이후로는 오랫동안 도대체 감동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모더니즘이나 (오인된) 포스트모더니즘에 일어난 어떤 문학 내적 영향이나 사건 때문이라기보다는, 명백히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정치적으로 올바른방향의 사회사와 관련된 일들 때문이었다. 내 감동을 위해 군부 독재를 연장하거나 독일 통일을 막는다거나 페레스트로이카를 저지(할 수 있다손 쳐도)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 이후에 느꼈던 오랜 지리멸렬과 권태를 고백하지 않는다면, 이 글은 애초에 쓰여질 이유가 없었다.


지난 봄 초입에 인터뷰 때문에 만난 김정환 시인과 나는, 내가 가져보지도 못했던 것을 배반했다는/빼앗겼다는 80년대에 대한 죄책감/구원(舊怨)을 고백하면서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타는 목마름으로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를 동시에 읽어버린 세대로서 말입니다, 저는 80년대 시인들이 물려준 세계에 원망도 많았지만 부럽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그때는 시의 시대였지 않습니까.” “80년대가 무슨 시의 시대요? 지금이 시의 시대지.”


진심일까? 잘 모르겠다. 누구나 80년대가 시의 시대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그의 말은 후배 시인에게 용기를 주려는 너스레이거나 과장일 수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 세대의 부러움이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그것은 너무나 생생한 가상이었을지도. 어떤 세대가 한꺼번에 만들어낸 세계에 대한 공동 해석을, 현실이 아니라 텍스트의 형태로 자기를 학습시킨 나는, 아무도 그러라 하지 않았건만, 너무 생생하게 추경험해버린 나머지 일종의 섬망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간 나는 2년 전엔가 볼셰비키같은 단어를 시에서 비유로 쓰면서(이젠 그럴 때도 됐다고 나를 설득하면서), 여전히 그런 단어가 결코 비유일 리 없다는 사고에 사로잡힌 어떤 독자의 굉장히 심각한 비평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내가 그런 낡은 단어를 가지고 구식 선전선동을 하고 있다고 착각했던 모양이다. 글쎄, 그 단어를 (아직)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낡은 것일까, 그 단어는 비유로 쓰일 리가 없다고, 은밀하게 단단한 이콘으로 만들어놓고 그 사실을 잊어버린 채 낡았다고 비난하는 것이 더 낡은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생존중인 한반도 주민 중에 어느 누구도 혁명을 비유로 사용해선 안 될 텐데 말이다. 이 포스트모던한, 91년에는 도무지 뭔지 모르겠던, ‘80년대로부터 소외당하면서 그렇게 그 속으로 탈출하고 싶었던 그 미래 속에서도, 혹은, 자기 것이 아닌데도 80년대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소외당하고 있는, 이 포스트모던한 미래 속에서는, 나날의 좁쌀만한 디테일들을, 우선, 쓰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래에 관한 전망은커녕, 우선 2000년대를 수놓은 크고 작은 수많은 재앙들이 세기말의 권태의 반대급부로 나를 지쳐빠지게 했다는 사실을. 벌 받았다는 사실을. 이 사실이 내 속에서 악마의 씨앗으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악마적인 근과거가 있다는 것을. 91년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비아냥거리며 쓸 수 있게 된 후래자(後來者)의 권리를 또한 비아냥거릴 권리를 가진 끝없는 나래비를 생각하면서. 이 요한계시록의 뒷장에. 이념이 끝난 게 아니라, 진짜 이념이 필요하다고. 우선. 돈 말고. 사랑할 만한. 존경할 만한 이념이. () 2015-08-17

-<쓺> 2015년 창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