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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 동안 끔찍한 뉴스들이 현저히 많이 쏟아지고 있다는 것은 단지 저의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그 전에도 대형 참사들은 있었고, 패륜적인 범죄는 저질러지고 있었으며, 전쟁과 테러가 어디에선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저의 세대 사람들에게, 잔혹함의 여러 유형들이 이토록 종류와 규모에 있어 많고도 다양하게 짧은 기간 동안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 적이 없었다는 느낌은 쉽사리 떨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네트워크 기술의 발달 때문에 가능해진 체감의 차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공중파와 종이 신문만 있었던 시절보다 비교할 수 없이 많은 미디어의 통로들을 시간의 제약 없이 접하고 있습니다. 알려질 수 없었던 참상들과 그 세부를 이제는 우연히 알게 되는 일들이 더 많아졌고, 이것을 이런 저런 망(너무 많은 그물!)을 통해 공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적극적인 의지와 상관없이도 끔찍한 일들을 더 자세히 추체험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며 만일 우리가 적극적으로 의지한다면 단지 그것만을더 자세히 추체험할 수도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악취미에 의해서건 도덕적인 분노 때문이건 그것을 자세히 추체험하는 일을 왠지 멈출 수 없다고 느끼게 되는 일들이 이전보다 더 잦아진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정보통신기술은 우리의 앎과 행동을 손가락과 시신경에 이양하도록 권유했다고 기술과 자본주의의 결합 방식을 탓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결과에 우리 자신이 (자타의 은밀한 욕망의 부추김 속에서) 이미 동의해왔다는 그 사실 때문에, 벌어지는 모든 사태에 우리가 샅샅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잊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것이 도덕적인 분노 때문이라면(그러나 이것을 악취미와 분명히 구분하기란 무척 까다로운 일이기도 하지요), ‘아이, 피곤해! 이제 뉴스 따위는 보지 않겠어!’라고 매일 다짐해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마음 한쪽에선 넌 지금 그 모든 사태들에 직접적 책임이 없다는 사실을 그 사태들의 관찰자가 됨으로써 스스로 입증하고 놀라고 분노하면서 자기 양심을 위무하고 있다.’고 중얼거리고 있고, 다른 한쪽에선 이 모든 것들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 역시 고통을 상상하지 않음으로써 일신의 안녕을 보존하려는 얕은 수작이다.’라고 말합니다.

알게 되면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엄청난 양의 크고 작은 책임질 일들 앞에 놓이게 된 자신을 발견한 우리 동시대 사람들의 대부분은, 정말이지, 가끔 있는 선거에서 제대로 처리될지 확신하기조차 힘든 한 표를 행사함으로써, 누군가의 말을 따르면, ‘일종의 배경음악처럼 우리 머리 위의 기후를 지배하고 있는 정치 체제의 지향과 분위기를 바꾸는 데 일조할 수 있다는 조언을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실낱같은 희망의 실마리는 너무나 작아서 우리는 곧잘 무력감에 빠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앞으로 하려는 이야기를 이 같은 점증하는 일상적인 피로와 무력감에 어떻게 관련지어야 할지 저는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갈수록 점증하는 잔혹한 이미지들이 미디어에 동원되고 이에 절망하고 무력감에 빠져가는 저와 같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손가락을 다른 곳으로 튕겨 멋진 경치나 아름다운 꽃, 맛있는 음식과 동물, 아이들의 웃는 표정을 봄으로써 기분을 전환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참혹한 일들의 참혹함은 바로 그 같은 평온하고 안락한 이미지의 표면을 뚫고 나오면서 가하는 충격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니까요. 여객선이 떠 있는 평화로운 바다, 권태로울 만큼 무성한 자연으로 가득 찬 비무장 지대 근방, TV가 세세하게 묘사하는 남의 집 냉장고 재료의 눈부신 변신, 의문의 여지없이 흐뭇함을 안겨주는 순종적인 애완동물의 애교와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어린아이들이 카메라를 향해 짓는 미소. 이제 우리는 거기에서 침몰과 총기 난사와 학대와 유기된 시신을 떠올리기 직전입니다.

학습된 불행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달아나보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또 다른 참혹의 서사와 이미지로부터 동일하거나 더욱 구체적이 된 고통의 실감을 마주합니다. 그리고 최악의 실제 사례들로 구성된 다양한 이미지들은 일상적인 풍경을 급기야 파국의 가장 비극적인 판본으로 바꾸어놓기 직전에 있다고 느끼기 시작합니다. 뉴스와 논평의 홍수 속에서, 최악의 상상을 나날이 더 나쁜쪽으로 갱신하는 현실은 폭력적인 장르 미학이 더 이상 미학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새로운 현실주의의 시절을 예고하는 듯합니다. 그 과정 속에서 작년 봄, 이제는 문화의 변방을 겨우 차지하고 있을 뿐이라던 문학마저 작가의 진정성을 둘러싼 스캔들에 휘말렸을 무렵, 한 소녀가 아홉 살에 썼다는 시 한 편과 그것이 처해 있던 상황은 저에게 무척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땐

이렇게 엄마를 씹어 먹어

삶아 먹고 구워 먹어

눈깔을 파먹어

이빨을 다 뽑아 버려

머리채를 쥐어뜯어

살코기로 만들어 떠먹어

눈물을 흘리면 핥아 먹어

심장은 맨 마지막에 먹어

가장 고통스럽게

--이순영, 학원가기 싫은 날, 솔로 강아지(2015)

 

출간된 지 몇 달 후 이 시가 알려지면서 작품과 작가, (그리고 그가 어린아이라는 사실로 인해) 그의 가족 전부는 쉽게 예상할 만한 비난에 휩싸입니다. 작가가 패륜적인 사이코패스일 것이라는 추측이 댓글로 달리고, 그의 어머니와 출판사, 삽화가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이 같은 반응은 분명 숙고 끝에 나온 것일 리 만무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저 이미지의 잔혹성이 반추하도록 만든 더 많은 실제 사건들갑자기 급증한 것처럼만 보였던 가학-피학적인 학대 사건들의 홍수 속에서 거듭 고통을 상상함으로써 피해자의 위치에 서게 될 수밖에 없게 된 미디어 사용자들의 본능적인 반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책 전체를 읽은 사람들은 (베스트셀러 작가를 둘러싼 논란에서와 마찬가지로) 별로 없었고, 그 모든 소식은 뉴스의 형식으로 전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사회 관계망 서비스에서 급증하기 시작한 작가에 대한 옹호론 역시 저로서는 곧바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작가는 신동이거나 천재이며 이 시를 수록하도록 흔쾌히 허락한 작가의 어머니는 개방적이고 관대한, 다시 말해 민주적인 교육 담당자라는 견해는 전체주의적인 광기와 닮아가는 듯한 대중의 도덕적 분노에서 비롯된 비난에 대한 반발심으로 채색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단지 금기를 위반했다는 점이 새로움으로, 또 단지 새로움만이 예술적 재능의 증거로 생각되지 않았던 저는, 작가를 옹호하는 기사에서 작가가 이상(李箱)오감도를 좋아하며 파퀴아오의 팬인 자신이 메이웨더의 팬으로 오도된 기사에 불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한 반응을 읽고 나서도 무언가 불편한 감정이 계속 남아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물론 그것은 일견, 예술의 오랜 숙제인 도덕과 미학의 꾀까다로운 관계가 전화기 액정 속에서 쉴 새 없이 찬반 논쟁을 통해 환기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인의 시를 둘러싼 반응은, 마치 2천 년대 초반 소위 미래파시인들의 시를 둘러싼 논쟁의 속화된 형태로 생각되었습니다. “어린아이는 무서운 생각을 하면 안 되나요?”라고 작가는 물었지만, 무서운 생각과 무서운 생각의 표명 사이에는 간단치 않은 문제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작가는 모르고 있지 않은 듯했습니다. (어린아이가 무서운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추정은 단순함의 덕을 지닌 사람들의 것이겠지요.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엄마를 먹는 시를 쓰는 대신 병아리에게 다트를 던지거나 짝꿍을 연필로 찍는다는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예술적인 표현은 생각과 행동의 사이에 있습니다. 무서운 예술적 표현은 무서운 생각과 무서운 행동 사이에 있습니다. 그래서 시는 실제 행동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또다른 행동이기도 한 것일 테니까요.

시집 전체에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자주 등장하는 어머니에 대한 증오와 과도한 학업량에 대한 분노에 가까운 불만은 이 시를 이상에 매혹당한 시인의 초현실주의적인 잔혹한 상상이라고 간주하는 견해나, 시를 단지 미학적 향유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시는 단지 시일 뿐.”이라는 작가 자신과 가족의 시종 쿨한 반응을 반박하고 있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이 시가 실린 시집의 작품 전체는 작가와 작가의 가장 가까운 후견인(시집에서는 시종 적대자로 등장하는)의 공식적인 견해에 대항해 일종의 시위를 벌이고 있는 것처럼 읽혔던 것입니다. 흔히들 알고 있듯 어린 아이들은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하고 반복적으로 듣고 싶어 합니다만, 저 시의 카니발리즘은 무서운 동화들 중에서도 상당히 보호막이 씌워진 <빨간 모자 소녀>보다는 훨씬 노골적인 <엄마는 나를 죽였고 아빠는 나를 먹었다>(<노간주나무 이야기>)와 더 직접적으로 닮았습니다. 시집 전체를 읽을수록 모성적 초자아에 대한 강렬한 적대감은 점점 더 분명해집니다. 유일한 친구인 강아지 순둥이의 외로움을 초래하는 것도 엄마’(솔로강아지), 칼을 든 식인 인형이 자신보다 먼저 먹어버린 것도 엄마’(식인 인형),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도 엄마입니다(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이것이 동시란 말인가?’라는 경악은 정당했습니다. 동시가 아이를 독자로 하는 시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전량 폐기 처분을 받아들인 작가의 가족은 논란이 잦아들고 늦가을에 접어들 때쯤 학원가기 싫은 날을 제외하고 신작시 9편을 추가하여 개정판을 출간합니다. 그리고 시집의 원제 솔로강아지에는 어른을 위한 동시라는 부제가 붙었습니다. 이 개정판 시집은 핵심적인 메시지가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 작품이 삭제당하기는 했지만 적으나마 작가의 본래 목적을 달성한 셈입니다. 자신에 대한 후속 세대의 카니발리즘적인 비난을 단지 미학으로 받아들이고 감수하기로 한 개방적이고 관대한 앞선 세대는 마치 그림 동화에 수록된 <노간주나무 이야기>에서 새엄마에게 죽임을 당하고 아버지에게 먹힌 뒤 새가 되어 엄마는 나를 죽였고 아빠는 나를 먹었네라는 아이의 노래를 듣고 정말 아름답구나! 다시 한 번 불러주렴.”이라고 환호하는 마을 사람들을 닮아 있는 것만 같습니다. 메시지가 목표에 적중하지 못한 채, 작품이 곧장 도덕적이거나 미학적인 평가 속으로 들어가 버릴 때, 작가의 실존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처음 출간되던 당시 그 시만은 반드시 수록되어야 한다던 시인의 간절함과, 논란 이후 시는 시일 뿐이라던 미학적 분리주의 사이에서 갈등했을 것이 분명한 시인은 이 시가 자신의 어머니뿐 아니라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에게 갑자기 노출됨으로써 과도하게 목표를 달성하고서도 실제 목표는 더욱 더 멀어진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이 시는 외견상 1987년에 출시되어 그해 아이들의 최고의 유행가가 되었던 다음의 노래와 주제를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1.꼭두각시 인형 피노키오 나는 네가 좋구나

파란 머리 천사 만날 때는 나도 데려가 주렴

피아노 치고 미술도 하고 영어도 하면 바쁜데

너는 언제나 공부를 하니 말썽장이 피노키오야

우리 아빠 꿈속에 오늘밤에 나타나

내 얘기 좀 잘 해줄 수 없겠니

먹고 싶은 것이랑 놀고 싶은 놀이랑

모두 모두 할 수 있게 해줄래

 

2.꼭두각시 인형 피노키오 나는 네가 좋구나

장난감의 나라 지날 때는 나도 데려가 주렴

숙제도 많고 시험도 많고 할 일도 많아 바쁜데

너는 어째서 놀기만 하니 청개구리 피노키오야

우리 엄마 꿈속에 오늘밤에 나타나

내 얘기 좀 잘 해줄 수 없겠니

먹지 마라 살찐다 하지 마라 나쁘다

그런 말 좀 하지 않게 해줄래

 

3.꼭두각시 인형 피노키오 나는 네가 좋구나

파란 머리 천사 만날 때는 나도 데려가 주렴

학교 다니고 학원 다니고 독서실 가면 바쁜데

너는 어째서 게으름피니 제페토네 피노키오야

엄마 아빠 꿈속에 오늘밤에 나타나

내 얘기 좀 잘 해줄 수 없겠니

피노키오 줄타기 꼭두각시 줄타기

그런 아이 되지 않게 해줄래

--작사 지명길, 작곡 김용년, 노래 혜은이(1987)

 

이 노래가 나온 시점에 저는 초등학교의 마지막 학년을 다니고 있었지만, 이 경쾌하고 동화적인 노래의 주제를 공감하기 힘든 게 사실이었습니다. 피아노 치고 미술도 하고 영어도 하고, 숙제도 많고 시험도 많고 할 일도 많아 바쁘고, 학교 다니고 학원 다니고 독서실 가느라 바쁜 노래 속의 화자는 먹고 싶은 것, 놀고 싶은 것을 일일이 통제 받으면서 꼭두각시가 되어가는 자신의 처지를 피노키오에게 털어놓고 있습니다. 분명 이 노래의 작사가는 성인이었고, 저나 제 또래의 경험에 비추어 노래 속 아이가 묘사하는 극성스러운 현실은, (이 노래가 아이들 사이에서는 대대적으로 유행했는데도 불구하고) 87년에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학원가기 싫은 날아이답게썼다면 아마 이런 모양이 되었겠지요. 그러나 87년에 어른이 쓴 예쁜 노래와 2015년에 아이가 쓴 무서운 시에 공통적으로 서려 있는 모종의 위화감이 여전히 아주 사라지지는 않는군요.

아마도, 여러 겹으로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 시가 가진 또 하나의 이질감은 바로 이 계층적 위화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 시의 표현과 흡사하다고 생각한 것은 앤 섹스턴이나 초기 최승자의 독하고 자의식 강한 시와 더불어 최서해 초기의 잔혹한 장면 묘사에 공을 들인 자연주의 소설들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지금 문학사적 가치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라 표현 방식 상의 특정한 패턴이 보여주는 공통성을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이들은 계급적으로 동일하지는 않았지만, 비꼬는 어법(sarcasm)과 강렬한 파토스를 지닌, 고통에 민감하기 때문임에 분명한 뛰어난 고통의 재현자들이었지요. 최서해의 비참한 사회적 현실의 묘사든, 앤 섹스턴이나 최승자의 실존적인 고통의 기술(記述)이든, 자기 고통의 역치점을 끝까지 끌어올려 파국을 보여주는 재능이 있었지요. 서사적이거나 서정적이기보다는 문제적인 이들의 공통점은, 작품과 마찬가지로 작가 자신도 무척 고통스러웠다는 점입니다. 강남에 살면서 모성적 초자아에 짓눌린 꼬마 시인이라고 해서 고통의 대가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시가 아니라 시인의 심리적 현실이 적이 걱정되는 것은 성인 독자의 과도한 반응일까요? 가장 노력을 들인 자신의 시위(, 모든 시는 프로테스트이니까요)가 지속적으로 진짜 대상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에 실패함으로써 계속 쓰여지고 있다는 이 비극은, 지금 곳곳에서 동일하게 벌어지고 있는 우리 자신의 온갖 은밀한 시위 행위의 좌절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요?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사회적 현실이 과거로 회귀했다고 탄식하고 있고, 저 역시도 그렇게 추정하고 있었습니다만, 최근 저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웃들에게는 친절하지만 집안에서만 자신의 뜻대로 안 되면 냉정하고 무서운 눈초리를 하는 엄마를 가진 아이라고 상상했을 뿐인데, 저는 이것이 지금의 무력감과 절망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밥을 안 먹고 있을 때

엄마는 용돈을 깎는다

 

오래 자고 있을 때

엄마는 텔레비전 리모콘을 없앤다

 

방 청소를 안 하고 있을 때

엄마는 순둥이를 집 밖으로 쫓아낸다

 

순둥이는 뭔 죄가 있나?

나는 뭔 죄가 있나?

이순영, 죄와 벌전문

 

통제자의 마음에 안 드는 행위를 하고 있는 에게 부당하고 우회적인 처벌을 통해 옴쪽달싹 못하게 행복의 총량을 효과적으로 감소시키는 저 통치술은 근과거의 노골적이고 잔인한 통치술과는 근본적으로 달라 보입니다. 용돈을 깎고 텔레비전 리모콘을 없애고 유일한 친구인 애완견을 내쫓는 우회적인 처벌 방식은 나는 너를 때리지는 않아. 밥을 먹이거나 깨우거나 청소를 강요하지도 않아. 하지만 그 밖에 너의 가장 친숙한 즐거움을 앗아갈 수 있는 모든 (민주적이라고 간주된) 방식을 사용할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전언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뉴스를 너무 많이 본 것일까요? 그래서 그런지 요즘에는 무엇 하나 수상한 뉘앙스를 띠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끔찍한 뉴스들이 현저히 많이 쏟아지고 있다는 것은 단지 저의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그 전에도 대형 참사들은 있었고, 패륜적인 범죄는 저질러지고 있었으며, 전쟁과 테러가 어디에선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벌어지는 모든 사태에 자신이 샅샅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잊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것이 사이코패스라 오인된 꼬마 시인의 잔혹한 카니발리즘이 보여준 고통의 항의가 실제로는 실패하고 상징적으로는 성공한 일이든, 하나도 맞은 것 같지는 않은데 자꾸만 친숙하고 일상적인 행복의 총량이 큰 폭으로 감소하고 있다는 착각이 착각이 아닌 것만 같아 동시에서 뉴스를 읽고 마는 실제로는 실패하고 상징적으로는 그럴 듯한 일이건 말입니다.  (끝)

 

-계간 <21세기 문학> 2016년 봄

 

표트르 크로포트킨, <아나키즘>

</아나키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