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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 context

박순원, 『그런데 그런데』(실천문학, 2013)

 

나는 한때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정자 하나 난자 하나였다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눈도 코도 없었다

나는 겨자씨보다도 작았고

뱀눈보다도 작았다

나는 왜 채송화가 되지 않고

굼벵이가 되지 않고

이런 엄청난 결과가 되었나

나는 한때 군인이었다

군가를 부르며 행진하고

총을 쏘고 일요일이면

축구를 했다 내가 쏜 총알은

모두 빗나갔지만 나는 한때

군인이었다

나는 지금 삼시 세 때

밥을 먹고 코를 골며

잠이 드는 사람이다

물고기도 다람쥐도 이끼도

곰팡이도 척척 살아가는

것 같은데 별일 없는 것 같은데

다들 좋은 한때를 보내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불안하고

왜 이렇게 후회가 되는가

겨자씨보다 뱀눈보다

작았던 내가 사람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었던 내가 이렇게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시대에

발을 맞춰 행진을 하고

(12-13)

 

 

마흔넷

 

 

앞으로

일하면서 이십 년

노후로 여생으로

이십 년 차라리

 

꽃잎을 뜯어 먹고

지금 죽을까

 

내가 죽으면 아내는

미망인이 되어

미망이 되어

아니지

 

아니지 재혼하겠지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슬픔에 겨워 겨워 울먹이고

까무러쳤다가 일어나

장례도 치르고

보험 처리도 하고

 

구름이 흘러 흘러

 

한 달쯤 지나서 다시 출근도 하고

그래도 아직은 시무룩한데

내가 아내 몰래 얻어 쓰고 갚지 않은

 

팔십만 원 구십만 원 현금서비스

약관대출 만기일이 하나씩 하나씩

돌아오면 가슴에 있는 말 한마디를

끝끝내 하지 않은 내가

얼마나 미울까 야속할까

 

새로운 슬픔이 솟아나고

그렇게 일 년 이 년 출근하고

퇴근하고 어린아이 둘 씻기고

밥해 먹이고 숙제 봐주고

 

새로운 꽃잎이 빨갛게

노랗게 반짝이다 시들고

반짝이다 시들고

하얗게 분분분 날리기도 하고

 

한두 번 거절하다 성화에 못 이겨

마지못해 선을 보고 자리만 적당하면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미망에서 벗어나

 

나는 꽃잎을 뜯어 먹고

또 다른 저승으로

꽃잎을 뜯어 먹고

또 다른 저승으로

(2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