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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 context

김상혁, 『이 집에서 슬픔은 안 된다』(민음사, 2013)

 

 

묵인

  

아직 젊었던 술집 여자의 등을 당신께 보냅니다 그 등에서 참았던 내 겨울도 보냅니다 나를 아들이라 부르던 손님들의 택시비와 이국땅에서 일요일마다 내게 주어지던 몇 푼의 돈도 함께 보내지요 나는 꼭 저금을 하는 기분입니다 당신이 남기고 간 기록들을 한 줄 한 줄 짚어 봅니다만 아마 실수로 빠진 내 이름이 오늘도 없습니다 요즘 당신은 통 편지를 보내지 않지요

 

어릴 적 공터에 뛰던 플라스틱 말들을 당신께 보냅니다 그 위에서 견디었던 내 예감도 보냅니다 먼 나라에서 한 번 당신을 본 적이 있지요 새벽이었고 당신은 내 가슴을 열고서 울기만 했습니다 결국 유사한 아침을 맞이하며 나는 사과나무 사이를 뛰어다녔습니다 종종 나무의 배후에서 당신을 봅니다만 그것은 비밀에 부칩니다 나는 말을 못 하는 일에 익숙하지요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를 금방 비밀로 삼았습니다

 

당신 것을 당신께 보냅니다 당신은 아무리 짊어져도 무거울 리 없지요 봄이면 문설주에 피를 발랐다는 동화처럼 행운을 위해 가족들이 당신을 찾습니다 안부를 물으며 모두가 붉은 손으로 뛰어나오는 골목 나는 잠잠한 아침입니다

(24-5)

 

 

어쩌면

 

 

내게 고요를 청했다면 어땠을까 따뜻해서 무서운 등짝 말고 차비 말고 추우니까 조심히 가라, 내 옷깃 한 번 세워 주었다면 이불 아래를 뒤지는 청소 말고 내 방문 조용히 잠가 주었다면 나는 웃고 싶지 않았는데 간지럼 말고 칭찬 말고 나는 거짓말하는 것만큼 몸이 붓는 게 무서워요 부어오른 건 단단하고 굵어요, 말했을 때 질리지도 악수도 말고 그렇게 자라라, 머릴 깎아 주었다면 코가 기다란 새 구두 양 두 마리 노는 목도리 말고 하얀 종이 한 장만 펴면 세계가 참 좁았던 날 칼로 뾰족이 긁은 연필 하나 내 귓등에 얹어 주었다면 여백마다 빽빽이 적은 내 이름 딱히 미워할 사람 떠오르지 않아 잠이 많았고 나는 길몽을 감추는 습관이 생겼는데 늙은 가족들은 곧 죽을 것인데 엿보는 거 냄새 맡는 거 말고 통성기도하는 거 말고 어쩌면

(38)

 

 

돼지머리 남자

 

 

날카로운 쿠크리 칼[각주:1]을 든

발가벗은 전사의 춤이다, 춤을 추며

손끝 발끝부터 자기 살을 조금씩 잘라 먹으며

전쟁 없는 시대 고통을 잊으려고 점차 심취하는 남자

물구나무서면 쏟아지는 핏물

어떤 말로 말릴 수 있나 자기를 잡아먹는 오늘을 이루려 그는

누워서 잠자지 않고 제 성기도 만지지 않고 오직 모든 일상을 고통스럽게 만들어 왔는데

이런 게 아니라면 나의 자질은 무엇인가

이런 못난 얼굴에게 가능한 사랑은 무엇인가

(88)

 

  1. (인용자 주) 네팔의 구르카족 고유의 단검이다. 밀림에서 나무와 풀들을 헤쳐나가는 데 사용했으며, 살상력(殺傷力)이 높아서 근력이 많이 필요하지 않다. 그 이유는 칼의 무게가 날끝으로 오도록 계산되었기 때문이다. 네팔에서 쿠크리는 아주 존귀한 검으로 인식되며, 재질과 장식으로 소유자의 번영을 알 수 있을 정도이다. 구부러진 외날검으로 그리스 검이 모체라고 알려졌으며, 슴베 뿌리 부분에는 작은 구덩이가 있다. 이 구덩이는 여성 성기의 상징이며 칼의 위력을 증가시키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손잡이는 단단한 나무나 상아로 만들었으며 곧은 일직선으로 가드가 없는 것도 있다. (출처: 이시카와 사타하루, <무기사전>, 들녘, 2004))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