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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 좋은 꽃

이즈음 강의에서 황지우를 다루면서 김정환 시 생각이 많이 났더랬는데 나는 아무래도 10대 후반에 읽었던 시의 자장이 형성해놓은 80년대식 세계관을 나이에 걸맞지 않게 자꾸 고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30대 초반까지는 이것 때문에 80년대 시인들을 혼자 속으로 많이 원망도 했던 기억이 난다. (장정일이 서울에서 보낸 3주일에 해설 대신 80년대 시인들을 욕해놓은 것을 나는 백번 이해한다. 물론 격변하는 한국 현대 정치사 안에서 보자면 그도 나보다는 훨씬 앞 세대 사람인 것이 분명하지만, 저 충혈된 80년대의 격정이 미필적 고의로 감염시켜버린 '희생자'들은 자기 세대의 변방으로 밀려나 그 운명을 끝끝내 살아내야 하는 것이니까.) 아무튼 황지우를 읽으면서 자꾸만 김정환이 그리워 오랜만에 좋은 꽃을 꺼내 들고 읽었다. 맨 앞장에는 고등학교 때 내 글씨로 "1991년 가을"이라고 씌어 있는데, 아무래도 나는 이걸 내 용돈으로 산 게 아니라 문예반실에서 슬쩍 해왔던 듯하다. 1985년 초판본인 걸 보면 틀림없다. 그런데 뻔뻔하게도 나는 이걸 반실에서 훔친 연도와 계절을 굳이 표시해놓았구나. 선후배들이나 동기들이 집어갈까봐 먼저 집어왔겠지. 적어도 그 작은 공동체 안에, 적어도 김정환을 훔칠 사람은 없었는데 말이다.

 

 

 

 

책이 닳을까봐 비닐로 씌워놓고, 소심하게 파란 펜으로 별 표시를 해가며 읽은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해어졌으나,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는 아니고 컴컴한 방에서 문 잠가놓고 스탠드 불빛이 떨어지는 칼 자국 가득한 책상에서 읽었던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생애야 너의 일생으로/그들의 피와 살과 뇌세포가 되는 일이지/개입하는 일이야 서로의 삶에".

 

이런, 촌스러운, 믿음소망사랑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다짐하고 있지만,

바로 며칠 전에도 동료들의 훌륭한 시들을 까대고 와서 (시인 겸 평론가라는 것은 대체 얼마나 편리하고 비열한 포지션인가) 도대체 우리들의 시가 21세기에도 "서로의 삶에/모자란 만큼 피와 땀과/비린내나는 살덩어리로" 개입할 수 있을까,

이런 걸 기대하는 것은 역시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일까,

생각해보지만, 왼쪽에서 쿵쾅거리는 심장의 좌파적 성정, 이 심계항진과, 또 가끔 기적이나 돌연변이처럼 이런 성정을 가진 누군가가 나타날 수 있다고, 아니, 사람들은 언제나 저 비린내나는 서로에 대한 개입(사생활에 침투해서 자기의 괴물스런 얼굴을 들이미는 2000년대식 유아론적 타자론에서처럼 말고)의 가능성을 씨앗처럼 잠재하고 있을 거라는,

이런, 촌스러운, 믿음소망사랑으로 다시 돌아오는

(22년 전부터 언제나) 오늘.

 

울면서 외롭고 괴롭다는 광주 사는 석사 동기의 전화를 받았고, 나는 짐짓 평정심을 잃지 않은 척 쾌활하게 웃으면서, 심지어 수화기에 대고 먹던 저녁밥을 계속 먹으면서, 장학금을 상담사에게 쏟아부었던 대학 시절 얘기를 하면서, 상담이라도 받아보라고, 했는데, 그녀는

 

그러면 정말로 괜찮아지냐고

그러면 정말로 괜찮아지냐고

 

묻고, 나는 그러면 정말로 괜찮아질 거라고, 대답하면서,

끊었는데, <파업전야>에서처럼 몽키스패너를 들고 달려나가 깨부술 무슨 물리적인 무시무시한 혐오스러운 괴물 대신 모든 예쁘고 귀여운 것들이 나를 불쾌하게 만들고 있는 이 미래의 이상한 나라에선,

니나를 잡아간 괴물도 없는데, 편리하고 배 안 곯고 쌔끈한데, 

상담사한테 가보라는 엿 같은 충고밖에 할 수 없는 이런 걸 개입이라고 부를 수나 있을지,

모르겠고,

나는 도망이라도 치듯 다시 80년대를 읽는다.

 

그러면 정말로 괜찮아지냐고.

쪽팔리지 않냐고.

아니, 쪽팔려해도 좋으냐고.

이런 우라질 심정에 대해 공식적인 지면에서라면 말도 못 꺼낼 거면서 공개된 블로그에 올리고 알리바이를 만드는 짓거리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