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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 완전히 불순한 이유로 들추어본 몇 개의 계간지에서 보석 같은 시들을 보았고, 그것으로 괜찮다. 그 불순한 이유는 충족시키지 못했지만, 괜찮은 시 평론가가 별로 많지 않은 것은 별로 불행하지 않은 일이다. 괜찮은 시인들이 있다면, 그것으로 희망이 있다. 괜찮은 독자들이 별로 많지 않은 것은 훨씬 불행한 일이지만, 그건 괜찮은 시 평론가가 별로 많지 않은 이유와 직결되고 있는 것이고, 괜찮은 시인들이 있다면 괜찮은 독자는 언제든 태어날 수 있다. 그러면 괜찮은 평론가는 시간 문제다. 그들은 돌 속의 형상처럼 잠재되어 있다. 다만 가장 불행한 것은 정신성의 힘을 믿지 않는 제도가 참 오래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고, 이들이 돌 속에서 잠자고 있는 형상 따위는 상상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하루를 꼬박 산다는 것

 

 

                                                         이원

 

돌 속을 한 바퀴 돈다는 것 단단하다는 것 어느 쪽도 부서지지는 않는다는 것 숨구멍부터 뚫고 보는 것 당역 도착 지시문을 믿고 우당탕 뛰어가는 것 전광판이 떠났다면 떠난 줄 아는 것 비어있는 의자는 채워야 한다 끊임없는 계단의 세계 내려야할 곳을 지나치면 되돌아온다는 것 건너가시오 쏟아지는 그림자를 따라가는 것 나를 지나 나에게로 간다는 것 몸은 발 밖으로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 유효기간이 긴 우유를 고르기 위해 일요일에서 일요일까지 팔을 늘이는 것 뼈라는 뼈는 모두 세우고

 

심장은 왼편에 있다 그것

이 무슨 뜻인가

-<시와 세계> 2013년 봄호

 

 

힐베르트 고양이 원(圓)과 발발이 π

 

 

                                                      함기석

 

수학과 이교수를 따라 원과 발발이 π가 캠퍼스를 걷고 있다

연못 중앙엔 가시연꽃, 잉어들은

빨간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폐곡선 놀이에 빠져 있고

나무는 한쪽 발이 없는 불구의 컴퍼스여서

원은 누구의 고통도 측정하기 싫은 우울한 짐승이다

 

좀 빨리 걸어라 발발아, 나의 말은 지름이 점점 커져서

넓이를 측정할 수 없는 비문이 되고 있다

교수님 말은 비문도 법문도 아니에요 걸어다니는 성기에요

코를 킁킁거리며 π는 이교수가 뱉는 말을 핥는다

원은 각(角)의 나라로 망명하고 싶다

 

발발아, 인간은 누구나 비문이다

너는 먼지와 거품이고

난 진흙과 한숨으로 이루어진 바퀴고 체인이다

연못의 눈동자에 담긴 구름이 무한히 확장되어 없어지고

원은 자기의 생을 사고의 살인에 허비하고 있다

 

고로쇠나무가 흘리는 수액은

고로쇠나무의 피고 사상이고 가설이고 수식이다.

수식은 몸속에서 자라는 뼈, 죽음에 뿌리를 내리는 식물이다

발발아, 너는 너의 죽음을 어떤 수식으로 증명할 거니?

원은 자신을 구성한 같은 거리의 점들을 회의한다

 

교수님, 어떤 이론은 대못이에요

눈동자에 못이 박힌 달이 대낮에 예수처럼 울고 있다

교수님, 보세요 못에 박혀 붉은 녹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세계

말라 죽은 오동나무 밑엔 검은 돌이 우는 흰 그늘

원이 구르며 보이지 않는 발발이의 꼬리 끝을 응시한다

 

무한한 하늘 저편에서 거대한 시계 초침이 거꾸로 돌고돈다

3바퀴 2바퀴 1바퀴 0바퀴 -1바퀴......

연못 중앙엔 폭탄처럼 터진 가시연꽃, 잉어들은

수영복을 찢고 폐곡선을 찢고 까마득한 공중으로 헤엄쳐오르고

원의 중심0에서 죽은 새들이 분수처럼 난다

-<문학동네> 2012년 겨울호

 

함기석의 시는 작년에 등단한 젊은 평론가 이강진이 <시인동네>라는 계간지에 쓴 시평에서 보고 재인용한 것이다. (이 젊은 평론가가 빨리 30대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때 그가 지금 가진 정직함을 계속 고수하면서 좀더 풍부해진다면 정말 기쁠 일이다.) (저 수학 용어들이 가까스로 틀어막고 있는, 공포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슬픔의 크기를 대체 무엇으로 측정하면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