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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 context

<문학동네> 2012년 여름호

 

1.     특집은 잃어버린 미래를 사유하기”.

 

2.     젊은 작가 특집은 김성중. 그녀의 자전 소설 꼭 한 방울의 죄는 읽다가 울컥거리게 만든 좋은 글이다. 이렇게 자기 얘기를 예외적으로 쓰는 지면에서 솔직한 이야기들이 나올 때, 사실 그녀의 매력은 이 솔직함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태용의 작가초상도 김성중의 자전소설만큼이나 솔직해서 읽는 맛이 쏠쏠했다.

 

3.     이번 계절에 실린 단편소설들 중에서 읽을 만했던 것은 이만교의 마술의 집과 이상우의 비치. 또 한 번 이상우의 독특한 번역 화법 탓에 거론하게 되었는데, 신인상 수상작인 중추완월에서 그랬듯이, 이번 작품도 공들여 쓴 문체(다소 하드보일드 하고 번역체에 가까운)의 기묘한 완전주의 같은 것이 눈길을 끌었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그의 소설은 미국 소설, 미국 드라마, 미국 영화를 너무나 닮아 있어서 쉽게 비판할 수도 있는 여지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실이나 환상을 엉성하게 실험적으로 재현하는 다른 많은 소설들보다 오히려 완성도가 빛난다는 것이 아이러니. 이 책에서 만일 가장 비슷한 문법을 구사하고 있는 작품을 찾으라고 한다면 함께 실려 있는 한국 작가들보다 해외 작가란에 실려 있는 제니퍼 이건의 스페인의 겨울이 오히려 친연성 있어 보일 것이다. 물론 이토록 완성도에 공을 들이는데도 마치 진짜 번역 소설인 듯 오역처럼 보이는 희한한 한국어 구사가 간혹 눈에 띄는 것은 소설가의 의도일까. (가령, 서구어를 한국어로 직역한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수동태로 표현되는 서술어들.) 그럴 리 없을 것 같지만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천재! 주인공은 대중 드라마에 나올 것 같은 유명 연예인이고, 주인공의 버디인 히로인은 창녀이며(아마 제목을 우리말 음차로 그대로 적은 것은 이 소설의 배경인 해안가beach와 이 여주인공에 대한 주인공의 양가적인 감정을 암시하는 bitch를 함께 표현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주인공은 엄청난 인기나 이모의 죽음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는 21세기 식 뫼르소 같은 인물이다. 이 인물이 새로울 것도 없고 그 구도는 참으로 진부하기 짝이 없지만 본격 소설에서 이런 대중 문화의 클리셰를 과감하게 사용했다는 점이 오히려 독특하게 보인다 할까, 용감해 보인다 할까. 문장 상의 재치나 지나치게 극적인 충격 같은 것으로 승부하지 않는 것이 장점이지만, 주인공처럼 글도, 젊기 때문에 부리는 치기나 허세가 자칫 유치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일찌감치 자기 스타일을 대중적인 장르와 하드보일드한 문체를 섞어 만들었다는 점에서 앞으로 기대되는 작가.

이만교의 작품은 사실 굉장히 급조된 느낌이 있지만 누구나 가질 법한 유년의 기억의 향수, 오래된 문구점의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묘사가 인상적이다. 후반부의 반전은 별로 기대한 만큼의 효과를 내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인지적인 충격도 없고 환상을 증폭시키는 기제로도 별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다. 매너리즘적으로 집어넣은 인상이다. 그런데도 기억에 남는다니 이것만도 괜찮(지 않)나.

 

4.     시는 두 편을 건졌다. 다음.

 

용사 K

 

                임현정

 

 

전쟁 용사 K는 갈비뼈가 하나 없다.

총에 맞아 구멍이 뚫린 것인데

 

그때 분대장이 말했다.

뛸 수 있으면 뛰고

아니면 여기서 죽게.

 

그는 쏟아져나오는 내장을 틀어막고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공기 중에 퍼지는 짙은 피비린내가

옆구리가 터진 붉은 하늘의 것인지

무른 홍시처럼 퍽퍽 떨어지는 어린 목숨들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저녁이었다.

 

전쟁용사 K는 빗소리가 다발총처럼 박히는 날이면

개처럼 엎어져서 방공호를 파는 기이한 버릇을 가졌다.

그의 아들들은 녹슨 삽처럼 처박혀 있는 그를

툇마루에 눕혀놓고 술을 받아오곤 했다.

 

전쟁용사 K의 용맹한 팔뚝엔 작은 문신이 하나 있었다.

군에 있을 때

전우들과 함께 새긴 것이었는데,

누구는 一心이라고 하고

누구는 勇士라고도 하고

저마다 기억하는 게 달랐다.

때론 문신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못하는

무심한 세월도 있었다.

 

그가 한평생 목숨을 걸고 지킨 이념이었는데도 말이다.

 

 

봄밤, 참담

 

                            유희경

 

 

그는 여기에 없습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악수하러 간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없는 그는 어쩌면,

없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닳아가는 무게는 들릴까요

나는 오한을 음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의자를 끌어당기는 기분이 손끝에 있고

문자가 언어로 휘어지는 지금은

누구나 적고 버린 其間입니다

 

안부 속으로 끌려갔어요 그는

잘못이 없는 사람과

용서해야 하는 사람 사이로

꺼낸 의미와, 집어넣은 과거가

서로를 당겨 참담한 거리를 만들고

그늘은 차이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기억을 고르고 셈을 치르듯

더 큰 것의 주인을 재는 동안

소리없는 일화가 만개해

생명을 슬프게 합니다

나는 그가 없어졌습니다

나는 그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추억이라니

좀 해볼 만하지 않은지

얇은 옷 속에서 떨고 있는

 

누구든 돌진하고 있는 이 세계로

뒤져보듯 오고

보세요 이토록 죽은 사람아

누가 생애를 깨고 있는 것입니까

어두운 악수는 끝나지 않고,

그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테니

어두워지고 있는 이 거리로,

남아있는 나에게,

 

5.     제니퍼 이건의 스페인의 겨울은 밋밋하지만 심리 묘사는 매우 간결하고 섬세하다;

나 남편 없어.” 나는 그의 시선을 견디면서 말한다. 그것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토할 것처럼 급박하게 몰아쳐오는 고백의 기운이.이 세상에 내가 가진 건 아무것도 없어.”(526)

 

정겹고, 사소한 것들.(527)

(2012-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