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란…욕망 그 자체는 아니다…죄란 자율성, 자동성으로서의 욕망의 삶이다.율법은 욕망의 자동적 삶, 반복의 자동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요구된다. 왜냐하면 율법만이 욕망의 대상을 고정시키고, 주체의 ‘의지’가 무엇이든 욕망을 대상에 묶어놓기 때문이다. 주체를 죽음이라는 육체의 길로 끌어들이는 것이 바로 욕망의 이러한 대상적 자동성(대상에 의해 규정된 자동성)이다.(153)
여기에서 바디우는 예감하다시피, 무의식 문제를 끌어들인다. 위에서 논의된 문제는 언젠가 지젝의 "요부의 윤리"에 관한 글에서 다루었던 욕망과 윤리의 문제로 넘어간다. 여기에서 주가 되는 핵심어-죄, 욕망, 법(금지), 죽음-들은 라캉이나 지젝 같은 정신분석학자들의 주이상스에 관한 논의가 칸트의 실천이성의 논리를 끌어올 때의 맥락과 다르지 않다. 바디우에게도 역시, 정신분석학자들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법은 주체를 죽음의 편으로 끌어들이며(자동적이면서 동시에 수동적으로 대상에 욕망을 고정시킨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위반을 통해서라고 해석함으로써 반(反)칸트적 배치를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법에 둘러싸인 삶은 그 자체로 죄다. 사는 것 자체가 죄 짓는 일이다. 그런데, 귀 기울여야 할 것은 이어지는 논의를 통해 그가 (바울의 텍스트를 빌려) ‘위반’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자체의 폐지’를 지지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논의는 칸트에게서 그리 먼 것도 아니다. 칸트에게 단두대는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욕망이 금지된 대상에 고착될 때, 단두대는 욕망의 대상의 표지가 된다. 따라서 단두대를 수긍하거나 금지하거나, 그 최종심급은 단두대의 유무에 달려 있다. 그러나 칸트에게 있어서 단두대를 욕망의 표지로 여기지 않는 것이 진정한 도덕적 태도다. 그러므로 바디우가 ‘법 자체의 폐지’를 지지하는 것과 칸트가 ‘단두대를 무시하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태도다.
칸트의 입장을 더 철저히 밀고 나갔을 경우는 어떨까. 만일 ‘단두대를 폐지하라. 단두대가 있든 없든 자동적인 욕망에 따르지 않게 되는 것, 그것이 자연과 자유의 합치라는 나의 이상의 목표이다’라고 한다면. 여기에서 바디우라면 다음과 같이 말하리라. ‘‘사건’에 의해 주체화되어가는 주체는 법을 폐지하며, 죄를 염두에 두지 않고 산다.’
그런데 이것은 가능할까? 그것은 초자아의 죽음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살부충동의 세련된 발현 형태가 아닐까? ‘아들’의 담론은 ‘아버지’의 담론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것은 아닐까? 아버지를 죽이고, 영영 그 자신이 다른 아버지가 되지는 않고 아들로서만 존재하는 주체의 담론. 이것은 일시적으로는 흥분되고 신나는 감흥을 일으키지만, 그가 옹호하는 보편성의 논리를 과연 담지할 수 있을지 의혹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해답은 ‘사건’에 있으리라. 그러나 그것이 상상할 수 없는 형태로 일어난다면, 그것을 일으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맞아야 할 대상이다. 우리는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바울에 대한 바디우의 해석에서, 이 ‘사건’은 일어났다는 것인데, 즉 은총처럼 ‘주어졌다’는 것인데, 그것은 개개인에 따라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인가? 다마스커스로 가는 바울에게 그러했듯이? 그렇다면 이 논리는 유대 담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각자에게 그 ‘사건’이 도래하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바디우도 이 점을 알고 있었던 듯, 책의 말미에서 “…『구약성서』는 다시 주체화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199)고 쓴다. 관건은 율법을 폐지하고 ‘사랑의 법’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법 개념 자체의 폐지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