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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常

폭염 속에서 전지구적인 고민은 인류를 잠식한다

백만 년 만에 쓰던 글을 저장 직전에 잃어버리면, 폭염주의보가 내린 날, 남극에서 빙하가 녹을까봐 에어컨을 안 틀어주는 전지구적인 도서관 직원의 혼란스러운 눈망울과 마주했을 때처럼 하소연할 데가 없어 비참하다. "저도 정말 헷갈려요... 빙하가 녹고 있는데 사람들은 자꾸 에어컨을 틀어달라고 하고..." 그녀는 고민에 휩싸여 정말로 아노미 상태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럴 땐 정치적 올바름이고 지구네트워크고 환경론이고 에코고 나발이고 나는 그냥 흙바닥 위의 펭귄보다도 불우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아, 네, 당신의 지구적인 고민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더워서 땀범벅이 되어 지쳐빠진 채 허탕치고 집에 돌아가 각자 에어컨을 틀면 빙하는 더 빨리 녹을 텐데? 도서관은 책 보러 오는 곳이고, 너무 더우면 책을 볼 수 없다. 그녀의 전지구적인 고민이 도서관의 존재 이유를 녹이고 있는 걸 그녀는 모르는 것일까? 


오늘 이와 비슷한 딜레마를 이슈화한 기사 하나를 접했다. (-> 장바구니만 쓰면 환경오염이 줄어든다고?) 하지만 무슨 봉투를 쓰든 환경에 좋을 것 없다는 결론에 뒤이어 대미를 장식하는 "일주일에 고기를 한 번만 덜 먹는다면, 당신은 환경에 진정한 공헌을 하는 것입니다. 봉투 안에 어떤 걸 담아오는가가 진짜 중요한 문제라는 뜻이죠."라는 오레곤 주립대 화학과 교수인 타일러라는 사람의 말도 비슷한 문제를 던지는 건 아닌지? 결론은 어차피 '조금만 사는(live/buy?)' 수밖에 없는 거 아니냐. 


언젠가 ㅅ대학교에서 강의할 때 홈페이지에 학생회관 출입구에 생긴 말벌집좀 떼어달라는 글이 올라오자 환경동아리 학생들이 "그럼 말벌들의 주거권은?"이라고 댓글 단 것을 보고는, 그래도 NL/PD 논쟁 안 하는 게 어디야,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현실이 점점 확장돼서 진짜 현실과 전지구적 상상의 경계가 없어져버린 이런 고민들은 이제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기 신경증을 투여할 가장 좋은 고치가 되고 있는 것 같다. 툭하면 공정, 지구, 환경, 생명 같은, 조금이라도 반박하면 악인이 되어버리는 아름다운 주제들을 자기 베이스캠프로 삼고 가장 자본주의 영합적인 공정무역, 친환경 제품, 유기농, 그린에너지 시장과 내통하면서, '거봐, 조금 비싸고 불편하니깐 이렇게 도덕적이 되잖아'라고 귓바퀴를 간질이면서 속삭여주는, 디스토피아 비판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교묘하게 디스토피아(거기서 주는 건 자기 양심을 편안하게 하는 정신의 소마soma다.)적인 위선에 부딪칠 때마다 욕지기가 치밀어오른다. 


대량생산의 무차별성은 그저 역겹지만 '쿨'한 스타일이 되어버린 '착한 소비'의 위선도 꼴사납다. 빙하 걱정을 하고 있는 동안만은 이웃 걱정은 안 해도 되게 되니까. 자꾸 이런 생각들을 해대고 있으니 SNS를 못 하게 되지... SNS에는 아름다운 이야기들만 올라오고 있으니 말이다. 남극의 빙하나 말벌의 주거권이 인간의 생태와 무관하지 않은 걸 알고 있다고! 하지만 난 책을 읽으러 도서관에 왔다! 내가 여름 내내 책을 읽지 못하면 기후 문제에 얼마만큼 일조하게 되는 거지? 왜 24시간 풀가동되고 있는 너무 많은 일회용품들을 생산하는 공장이 아니라 도서관 냉방을 멈춰야 하는 거지? 도서관에 틀지도 않을 냉방 시설은 왜 한 거지? 도서관은 왜 만든 거지? 우리 이런 문화 기반 시설도 만든다,고 구청장 생색 내려고? 지구 위의 모든 도서관 냉난방을 멈추고 독서를 금지하면 우린 좀더 녹색 인간이 될까? 책은 왜 읽는 거지? 인간은 왜 고기를 처먹으면서 이렇게 많이 살고 있는 거지? 지구는 피임을 좀 해야 하지 않아? 이런 따위 더위먹은 생각들을 하게 된단 말이다. 폭염주의보가 내린 날, 도서관에 냉방을 하지 않으면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 평일 낮에 도서관에 오는 늙고 어린 실업자, 취준생, 은퇴자, 시인-주부-연구자-비평가-백수 들이 정녕 얼마나 땀에 절어야 지구가 건강해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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