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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常

침묵, 聖 요한의 집, 20130420

 

 

같은 산길에서 같은 나무 등걸과 따로 따로 마주쳐 우리는 각각 사진을 찍었다. 동생의 나무 등걸 사진은 유적지 풍경 같았고, 내가 찍은 사진은 명백하게 지나치게 유머러스한 인간(이나 동물)의 사체의 패러디였다. 그것은 다소 키스 헤링 식으로 단순화된 네 발 달린 짐승의 사체와 닮았는데, 그것도 머리를 자른 것이다. 뭉툭한 팔 다리는 몽둥발이처럼 되다 말았고 심지어 꼬리가 잘린 흔적까지 있다. 이것은 누가 봐도 나무의 시체인데, 이 나무는 동물을 패러디하고 있다.

 

이 글은 전혀 신성하지 않다. 침묵의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졌는데, 침묵은 고통에 어울리는 것. 열정이기도, 수난이기도 한 passion은 주체할 수 없는 자기의 충혈된 에고의 강력한 에너지를 가진 자가 그것을 극기하려 할 때 그의 일그러진 표정을 묘사하는 서술어의 계사다.

 

비가 내리고, 수도원에 나직하게 울리는 기도 소리는 나와 무관하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이 이상한 정황은 뉴에이지 식 서늘한 자기 명상과 가상의 신비주의 사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고, 사람들은 서로 원하는 대답을 하기 위해 자기의 무의식적인 안테나를 끊임없이 가동하고 있다. 침묵을 과제로 받으면 멍청한 침묵을(마치 이전부터 쭈욱 이것만을 원해왔다는 듯이) 필사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이 상황은 조금 우스꽝스럽다. 나는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하고 그들의 작은 뉘앙스의 미세한 변화나 표정, 목소리가 궁금해서 오늘 아침 이곳으로 오기 위해 승합차를 타려고 주교좌성당 앞마당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적이 들떠 있었는데 (어쩌면 조금 흥분하기까지 했다) 이곳에 오자 마자 요구 받은 '신성한 침묵'의 가면을 쓰느라고 나 자신마저 우스꽝스러워지고 있다.

 

나무 주제에 죽음을 패러디하면서, 악착 같이 동물의 주검으로 패러디하면서 필사적으로 비극적이 되려 했기 때문에 도리어 우스꽝스러워진 죽은 나무 등걸처럼 말이다.

 

*

 

그렇게 해서 나는 과제로 주어진 침묵 속에서 침묵 자체에 대한 명상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지난 주 세미나를 위해 Times Literary Supplement를 뒤졌을 때, 거기에서 발견한 한 서평은 <기독교 역사에서의 침묵>이라는 신간을 다루고 있었는데, 리뷰어에 의하면, 이 책의 내용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침묵과 소란은 지속적으로 교호해 오고 있다는 것이며 (구약에서는 아무도 속으로 기도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약에서 예수는 수난 당하는 내내 침묵을 지키며, 기적을 행한 뒤에도 제자들에게 입단속을 주문한다. 정교회 전통은 기본적으로 침묵 수행을 강조하며 오늘날의 개신교는 시끌벅적한 증언과 부흥회를 선호한다) 저자는 좀더 침묵에 집중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고 한다. 詩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텍스트와 행간의 중요성 어느 것도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침묵과 소음은 언제나 동시에 고려되어야만 한다. 또 다시 神詩學인가. 나는 같은 곳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일까. 神과 詩처럼 답 없는 거룩한 것들의 주위를, 돌면서, 나는 말할 수 없이 황홀한 소리와 침묵과 색채와 白畵를 보고 들었건만...

 

그것들은 너무나 모순되는 많은 것들을 나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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