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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hard

시와/의 죽음-미지수 X의 부재증명, 가눌 수 없는 체념의 층위

 

철학의 고백


총알이 빗발치던 1차 세계대전의 참호 안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써내려간 노트는 1921년, 자신의 유일한 생전 출판물로 완성된다. 그가 뽑아낸 군더더기 없는 철학적 명제들은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천착의 결과물로, 이는 언어적 전회라 불릴 만큼 정통철학의 문제를 언어의 문제로 날카롭게 포착한 것이었다. 그 일단은 다음과 같이 명제화된다. “철학은 말할 수 있는 것을 명료하게 묘사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좌우간 생각될 수 있는 모든 것은 명료하게 생각될 수 있다. 언표될 수 있는 모든 것은 명료하게 언표될 수 있다.”

이런 ‘말에 대한 믿음’은 근대 이전의 철학사 전체가 증명하고 있는바, 모든 철학은 말로 표현되기 전까지는 언제나 공상의 형태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믿음은, 언제인가부터 세계 전체를 낱낱이 알고자 했던 철학적 호기심에도 불구하고, 말로 할 수는 없고 오로지 ‘보여줄 수만 있는 것’들이 있다는 철학자들의 체념을 수반하기 시작하였다. 이 ‘보여줄 수만 있는 것’들을 단지 철학이, 비트겐슈타인이 깨달았듯이 어렴풋이 의미할 수만 있다면, 그 날것의 비의들, 생생한 기미들은 영영 철학적 방법들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인가? 비모순적인 일관된 철학적 논리들이 통째로 하나의 거대한 거짓말일 수도 있는 가능성은 언어에 대한 세밀한 천착이 이루어지기 이전에는 철학이 담지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조건이었는지도 모른다. 단 하나의 모순적인 생활경험으로도 완전히 무너져내릴 수 있는, 논리적 언어의 벽돌로 만들어진 전통철학. 그 수고로 가득 찬 거대한 집적물을 두고 비트겐슈타인은 그 모든 것을 다 합쳐도 진리/실에 도달하지 못할 가능성에 눈 감을 수 없었던 것이다. 포로 체험을 거치며 씌어졌으나 차분하기 그지없었던 그의 사유는 다음과 같은 고뇌에 찬 명제로 끝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