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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hard

할례 전야, 유-토피아의 말문 앞에서 : 뷔히너, 첼란, 데리다의 유령 회합



(일전에 어느 모임을 갔더니 B, C, D라는 세 사람이 모여 앉아 무슨 이야기인가를 하고 있었다. 보아 하니 앞서 두 사람은 이미 이야기를 끝냈고, 세 번째 사람은 두 번째 사람의 말을 이어받아 골똘한 얼굴로 떠듬 떠듬 이어가고 있었는데, 도무지 만연체의 문장을 끝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슨 대화를 나누었기에 이 사람은 이렇게 울듯한 표정이 되어 눌변을 힘겹게 이어나가고 있는 것일까? 그가 좀처럼 속 시원히 털어놓지 않기에 나는 한 사람씩 찾아가 따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였다. 이제 내가 듣고 생각한 바를 여러분에게 전한다.)

 

 

1.     B씨의 시계와 달력 : 유토피아?

 

레옹스 : 그럼 우리 시계란 시계는 모두 때려 부수고 달력은 금지합시다. 시간 가는 거와 달 가는 걸 꽃 시계에 맞춰 세어보자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횟수에 따라서 세어보잔 말이오. 그런 연후에 우리 이 왕국을 화경(花鏡)으로 둘러싸자고. 그러면 이제 겨울은 더 이상 오지 않을 테고, 여름엔 이쉬아와 카프리 섬까지 증발해서 날아갈 수 있겠지. 일년 내내 장미와 오랑캐꽃 그리고 오렌지나무와 월계수나무 사이에 묻혀서 살 수 있단 말이야.

발레리오 : 그러면 소인은 국무 대신이 되어 법령을 반포하죠. 손에 못이 박인 자는 금치산자로 규정하고, 몸에 병이 들도록 일한 자는 범죄자로 처벌받게 하고, 땀 흘린 얼굴로 빵 먹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는 누구나 정신이상자로, 인간사회에 위협적인 존재로 규정하게 될 것이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늘에 누워서 하나님께 마카로니와 멜론 혹은 무화과 열매 같은 것이나 주십사고 청하는 겁니다. 음악적인 성대(聲帶)나 고전적인 몸매 같은 것, 아니면 편안한 종교나 주십사고 비는 것이옵니다.

- 게오르크 뷔히너, 「레옹세와 레나」[1]

 

24세에 장티푸스로 요절한 게오르크 뷔히너는 그로테스크하면서도 환상적인 희곡 「레옹세와 레나」의 대단원에서 달력과 시계를 폐지해버렸다. 포포 왕국의 왕자 레옹세와 피피 왕국의 공주 레나는 서로 정혼한 상대임을 모르고 결혼을 피해 도망하다 우연히 주막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사이다. 이들이 결혼식 당일, 결혼식장인 포포 왕국의 궁전에 판지로 만든 가면을 쓰고 나타나자 국왕인 페터는 이 로봇들을 결혼시킨다. 원래 일어나기로 되어 있던 일이 우연히도 예정대로 더 완벽하게 일어났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된 것은 레옹세와 레나가 가면을 벗었을 때였다.

정해진 우연, 운명은 그렇게 불리운다. 이 작품은 뷔히너의 네 작품들 중 유일하게 해피엔딩이다. ‘비속한 경험적 일상 언어들을 검열당한채 뷔히너 살아 생전 유일하게 무대에 올려졌던 「당통의 죽음」에서 주인공인 당통을 비롯한 그의 혁명 동지들은 비도덕적 인자들로 낙인 찍혀 혁명의 이름으로 단두대에 올랐고, 「보이체크」에서는 전 도덕적일 만큼 그렇게 생활이 넉넉하지 못합니다라던 단순하고 가난한 주인공 보이체크가 자기를 배신한 아내를 착란 상태에서 찔러 살해하고 그 자신도 투신했음이 암시된다. 실존인물을 소설화한 단편 「렌츠」[2]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한때 괴테의 원숭이라 불릴 만큼 괴테의 열성적인 팬이었던 렌츠는 괴테의 연인을 짝사랑하다 그에게 절교 당한 뒤, 그 때문이었는지 뷔히너의 소설 속에서 (전기적으로도 그러했듯이) 서서히 미쳐가고 있었다.

유일하게 행복한 결말을 가진 작품이 가장 초현실적으로 읽힌다는 것은 시사적이다. 운명으로 기껍게 받아들일 만큼 행복한 우연이 희박하다는 것을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일까. 이 행복한 우연의 배경과 시간, 어이없이 일치하는 사건들이 빚어내는 섬뜩하고도 희극적인 분위기는 마치, 이 모든 웃음이 지상에 없는 장소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강변하고 있는 듯하다. 저 세상에서 레옹세와 레나는 왕자와 공주는 결혼해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동화적인 무한대의 시간 속에 있을 것만 같다. 시계와 달력은 폐지되었으니까. 지상에 없는 장소, 우리가 입이 아프게 떠들어대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그곳, 플라톤이, 신들을 모독해서 미꾸라지처럼 혼란을 일으키는 불온한 시인 종자들 따위는 없어야 한다[3]고 했던 그곳, 그러나 이제 시인들 말고 더는 아무도 진짜로 꿈꾸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곳, 유토피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