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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hard

2011 아시아 시 페스티벌 발제문) 아시아는 어디에 있는가

인류는 이제 단일재배를 개시하려 하고 있다. 인류는 마치 사탕무를 재배해내듯 문명을 대량생산해낼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 인류의 식탁에는 오직 그 요리뿐이리라.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힘의 탐구」, 슬픈 열대

 아시아 시 교류 심포지움의 발제문을 청탁받은 후 저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아시아가 어디에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화적인 권역 개념으로 생각하자니, 중동 아시아와 서남 아시아, 중앙 아시아, 동남 아시아, 동북 아시아 사이의 문화적인 차이는 건너뛸 수 없을 만큼 넓은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대륙 개념으로 생각하자니 유럽과 아시아가 어디에서 나누어지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아시아’라는 말은 대충 ‘비(非)서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를 강독하기 위해 재독하고 있던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에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발견했습니다(그라마톨로지의 2부는 슬픈 열대에 관한 탐구로 시작합니다).

 제일 오래된 구세계는 나이 어렸을 때 이미 신세계의 밑그림 얼굴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표면적인 대조나 외면상의 특이성을 경계한다. 그런 것은 단시간 동안밖에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국정서라고 이름하는 것은 고르지 못한 리듬을 말하는 것으로 몇 세기 동안은 의미가 있어서 서로가 함께 나누어 갖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같은 하나의 운명을 가리어 덮어버리는 것이다.

-「마법 융단」, 슬픈 열대(박옥줄 옮김, 한길사, 1998), 278-9쪽.

 이 인용문은 레비-스트로스가 브라질 고이아니아의 호텔에 체류하던 추억을 서술하다가 단번에 파키스탄의 카라치를 떠올리고 또 이 카라치의 추억으로부터 인도의 캘커타 여행에서 그가 목격한 ‘비참한’ 동양의 모습을 회상한 뒤, ‘구세계’인 인더스 문명의 ‘마지막 모습’을 ‘신세계’인 남미 대륙의 고이아니아와 연결 짓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는 이 일련의 연상 과정 속에서 “불쌍한 동양이여!”라고 부르짖으며 ‘천일야화’의 문명이 다다르게 된 말로(末路)를 보고 있습니다. 인류에게는 지구상 어디에 살든 일종의 보편사적 시간이 있는데, 어떤 이들은 새벽 두 시를, 또 어떤 이들은 밤 열 시를 산다는 식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구조주의자인 레비-스트로스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뒤쪽으로 120여 쪽을 넘어가면 그는 또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개진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이 부분(인도)을 가리키기 위해 저쪽 대륙에서 그렇게도 자주 사용하는 '아대륙(亞大陸)'이라는 말은 이제 새로운 뜻을 갖게 되었다. 이 표현은 이제 단순히 아시아 대륙의 일부분이라는 뜻을 갖는 것이 아니고, 차라리 '대륙'이라고 불릴 수 있는 자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어떤 한 대륙을 가리키는 데 쓰이게 되어버렸다. 그만큼 한 순환 과정의 극한점까지 추진된 해체작용이, 종전에는 수억의 인간을 조직된 틀 속에 수용하고 있던 그 구조를 파괴해버렸다. 그 결과 오늘날에 와서는 이들 인간은 역사가 생성한 허공 속에 버려져서 공포, 고통, 굶주림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동기에 의해서 좌충우돌 사방팔방으로 내몰리고 있다.

-「장터」, 위의 책, 300쪽.

 그가 추억하는 인도는 문명의 폐허, 언젠가 분명히 존재했으나 이제는 그 윤곽과 재만 남은 유적지 위에 끔찍한 잔여물들이 펼쳐져 있는 거대한 폐기물 처리장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시각에서는 “아대륙”의 대리표상인 인도는 자기 문명에 주어진 24시간을 모두 살고 난 뒤 자정 너머의 빈 허공 속에 체류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인도의 ‘현재’는 그러하되, 인도-아대륙의 ‘역사’는 이미 다 쓰인 해지고 낡아빠진 참고도서처럼, 남미 대륙이라는 눈앞에 펼쳐진 낯선 세계와, 탐사를 위해 떠나온 자신의 유럽 문명 양자 모두의 수수께끼를 이해하려 할 때마다 어떤 유사성을 드러냅니다.

 이 인용문은 자세히 읽으면 매우 혼란스러운데, 그것은 인도가 다른 종류의 보편적 역사 시간 속에서는 아직 ‘대륙조차도 아닌 어떤 곳’으로 기술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는 이 ‘문명 일반의 운명적인 보편 시간’ 이외에 또 다른 ‘보편사적 시간’을 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헤겔에 의해 정식화된, ‘문명은 동쪽에서 시작되어 서쪽에서 완성된다’는 서구 중심적 문명사관과, 레비-스트로스 자신이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발전사관이 결합한 이 시계는, 근대 이전의 각 문명의 시계를 부수어버리고 모든 지역의 자본주의 산업 발달의 정도에 따라 편향적으로 각 지역을 명명하기 시작한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시간을 의식한 데서 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탕무처럼 대량 재배되는 단일종의 문명’은 이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대륙'이라고 불릴 수 있는 자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어떤 한 대륙”으로서의 아시아는 이제 이 새로운 시계 침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뒤늦게 뛰어가고, 전 지구적인 자본주의 질서 이전의 ‘개별 문명’은 과거 속에 남겨진다는 점에서 레비-스트로스에게 열대 아메리카와 아시아를 비롯한 비서구는 비애감을 자아냈을 것입니다. 당시 이 레이스를 따라잡는 것마저 포기한 것처럼 보였던 인도에 대한 연민과 비애는 두말할 나위 없이, 이 책 전반에 걸쳐 그가 보여주고 있는 ‘다른 문명’의 가능성이라는 ‘차이에 대한 존중’과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기실, 이러한 비애감은 어떤 문명도 영원할 수 없으며, 각 문명에는 흥망성쇠의 기승전결이 있다는 뿌리 깊은 운명론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아니, 우리는 이것을 역사적 인식이 언제나 그 끝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비관주의라 불러야 할까요. 역사는 언제나 시공간적 유한성으로 귀결되는 사건들의 무한회귀처럼 보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귀납적이고 운명론적인 역사적 사유의 특징은 군집한 인간들이 보여주는 이기적이고 잔혹한 본성이 없다면 성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하나의 사회는 인구가 지나치게 많아지면, 그 사상가들이 아무리 천재라 할지라도 예속(隸屬)을 분비해가면서가 아니면 존속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그 지리적`사회적`지적 공간 안에서 답답해졌을 때는 한 가지 간단한 해결책이 그를 유혹할 우려가 있다. 그 해결책이란 인간이라는 종(種)의 일부에 대해서 인간의 자격을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것이다. (...) 아시아에서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아시아가 미리 보여주는 우리의 미래상이다.

- 위의 글, 310-311쪽.

 그는 카스트제도가 인구 과밀에서 비롯된, “예속을 분비”하면서 사회를 존속시키는 필요악이며, 위계질서를 통해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는 인간 사회의 보편적인 처리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에게 이 글을 쓰던 무렵 벌어지고 있었던 나치 독일의 인종말살 작업의 오래된 거울상으로 여겨졌던 듯합니다. 이 거울 위의 먼지를 털어내면, 빽빽하게 모여 있는 사람들이 제도라는 이름으로 차별을 만들어내고 온갖 합리화와 정당화를 거쳐, 인간이라는 동종(同種) 내의 작은 차이들을 이유로 조금쯤 다른 사람들을 솎아내고 있는 끔찍한 그림이 나타나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책의 후반부에서 “만약 서구가 민족학자들을 만들어내었다면, 그것은 서구가 양심의 가책을 몹시 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이미지를 다른 사회의 이미지와 비교해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럼주 한 잔」, 같은 책, 698쪽)라고 쓰고 있는 것이지요.

 대량생산 중인 단일 문명에 관해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 자신도 일상적으로는 때때로 이 단일 문명의 시계에 근거하여 우리 자신의 위치를 끝없이 정위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힘듭니다. 후진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발전해나가기를 독려하며 매년 경제 성장률을 체크하고 기획하는 각국의 정책과 홍보 속에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