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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hard

운동의 윤리와 캠페인의 모럴-'시와 정치' 논쟁에 부치는 프래그머틱한 부기


동경백색집단

 

어느 날 저녁, 평소와 같이 저녁을 먹고 TV를 켜자 다음과 같은 뉴스가 흘러나왔다.

 

앵커: 요즘 일본은 온몸을 흰 천으로 감싸고 유랑생활을 하는 백색집단 때문에 시끄럽습니다.

종말론을 내세우며 집단생활을 하는 백색집단이 자칫 큰 사고를 내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합니다.

도쿄 김동섭 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기자: 이 백색집단은 자신들의 몸은 물론이고 이동용 차량까지 온통 흰 천으로 감싼 특이한 외향으로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흰색이 전자파를 차단한다는 희한한 논리를 내세우고 있는 이들은 전자파가 적은 곳을 찾아다닌다며 산간지방 도로를 점거한 채 집단생활을 계속해 현지 주민들과 마찰을 빚다 결국 본거지로 돌아갔습니다.

일본 야마나시현 주민: 일단 기분 나쁘고 관광에도 영향이 있다.

기자: 이들은 전자파연구소라는 그럴 듯한 이름을 내걸고 있지만 실상은 헌금을 받아 꾸려나가는 사이비 종교 집단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의 사진만 공개돼 있는 이 여성이 사실상의 교주로 혹성이 곧 지구에 접근해 지구가 물바다가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치노 유코(대표): 니비르 혹성이 지구에 접근해 대지진·대홍수·대해일이 일어날 것이다.

기자: 이 여 교주는 스스로 시한부 말기 암 환자라고 말하고 있는데 진도 15도의 초대형 지진에도 끄떡없다는 피난시설을 지어놓고 최후의 날에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지난 94년 옴진리교의 지하철 독가스 테러에 놀란 경험이 있는 일본 사람들은 이 백색집단의 일거수일투족을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도쿄에서 MBC뉴스 김동섭입니다.

- MBC 뉴스데스크 2003510일 방송내용

 

이른바 동경백색집단으로 알려진 이 유랑인 집단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이들이 행하는 기행(奇行)의 도저한 유희적 뉘앙스 때문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흰 옷과 장신구를 걸치고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커다란 흰 천을 두르고 있는 이들의 퍼포먼스에서는 광신도 집단이 으레 띠게 마련인 광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2년 후 이 현장에 단원들과 함께 있었다는 사람을 우연히 만나 이것이 일본 자율주의자들의 반() 세계화 시위의 일환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즉각 떠올랐던 의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실험성을 극대화시킨 방식으로 과연 현실적인 정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다소 단순화시킨 방식이긴 하지만,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이 처음 등장했을 때 당혹감을 호소한 사람들의 반응이 이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 때문에 미래파 논쟁이것이 시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상반되는 대답들로 채워졌고, 시의 본질을 가정하고 문제 삼는 서정을 둘러싼 논의가 뒤따랐으며, 이 모든 논의의 주변을 소통이 따라다니고 있었을 것이다.동경백색집단에 대해서도 우리는 같은 형식의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것이 정치운동인가?’ ‘시위의 본질은 모름지기 피켓과 진지한 구호의 선전선동이 아닌가?’ ‘입장과 메시지가 일관되고 분명해야 하지 않는가?’ 이 질문들은 3년 뒤 촛불 집회와 그 시적 표현(의 유무와 당위성에 대한 질문)을 둘러싸고 현실화된다. “(‘촛불과 관련된 시를) 발표했는데, 아무도 그게 현시국과 관련된 시라는 걸 모르더라고요.”라는 한 젊은 시인의 난감함을, 광신도로 오해 받은 백색단원도 느끼고 있었을까?

 

 

논쟁의 시작

 

그러나 여기에 잇단 사회적 죽음들이 가시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자 질문은 한층 진지하고 화급해졌다. 문제는 실험적 퍼포먼스(작품)의 소통 가능성에서 광범위하고도 집요한 현실 정치의 퇴행적 변화와 시적 표현으로 축을 이동하여 지속되었다. 시인이자 철학자인 진은영이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에 감각적인 것의 분배를 발표한 이후 본격적으로 촉발된 시와 정치논쟁은, 처음에는 지난 세기에 일단락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던 특정한 사고방식에 다시금 불을 지핀 것처럼 보였다. 그러한 사고방식이란, 이를테면 문학 내에서는 순수 대() 참여, 리얼리즘 대() 모더니즘처럼 이항 대립 구도를 통한 문학과 사회 사이의 분명한 관계에 고착된 갈등과 고민이, 작가와 비평가, 독자 개개인의 실존적인 작품 생산, 수용, 보존 활동에 개입하여 바람직한 것아름다운 것을 일정한 방식으로 재현하기를 강제하는 사고방식이다. 그 때문에 한동안 방치되어 있었거나 곧 무용해질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낡은어휘들이 부활할 것 같은 조짐을 보였다. 이 논쟁은 직접 표면화되어 과거 순수-참여논쟁이나 리얼리즘-모더니즘논쟁처럼 노골적이고 첨예한 대립각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서둘러 미학과 정치라는 어휘 묶음에 반색을 표명한 옛 리얼리즘 진영의 옹호론과 재빨리 예술의 정치에 대한 경사를 염려스러운 눈길로 바라본 예술의 자율성 방어론은 감각적인 것의 분배라는 리트머스 시험지를 통해 여전히 온존하는 예술관의 괴리를 드러냈다.

논쟁의 말미에서 생각해보건대, 어렴풋하게 구분되는 양 진영의 반응은 이미 현실에 있는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갈등에 대한 시인의 고백과 다짐에 대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반색과 우려를 표명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사실 이미 이 논쟁 내부에 이 어렴풋함, 이제는 불분명해진 경계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는 체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모호함을 걷어내고자 새로운 어휘들을 동원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던 것일 터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와 정치논쟁은, 1960년대나 1980~90년대의 앞선 논쟁들과 주제는 유사하지만 논쟁의 참여자들이 보이고 있는 일정한 괴리의 잔존에도 불구하고, 특히나 1980년대 논쟁을 경험한 이들의 후속 세대가 작품의 미학적 형식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강한 욕망을 보여주었다는 데서 특징적인 차이가 두드러진다.

따라서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며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거나 지지 방문을 하고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논문을 쓸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는 시인의 고백은 사실 표현에 방점이 찍혀 있었고, 또한 이장욱의 글이 보충해주었듯이, “삶의 (표면적일 뿐 아니라 동시에 잠재적인) 모든 부면을 필요로 하는 시의 형식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은 시인의 개인적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난해하고 미학주의적인 스타일을 고수하는 듯 보이는 젊은 시인들의 시가 어떻게 현실 정치와 관련한 문제들에 정치적으로 반응할 수 있을까, 진은영의 말을 빌리면, “어떻게 감성적 불일치를 구성할 것인가?”라는, 자신을 포함한 동료 시인들에 대한 공통의 물음으로 확대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요는, 퇴행적인 정치 현실 속에서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는 정치적 진보주의(정치적 아방가르드), 이미 자생적으로 군락을 이루고 있는 미학적 진보주의(미학적 아방가르드)로 하여금 어떻게 (재현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시킬 것인가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진은영은 오랜 허기와 미각을 동시에 만족시켜줄이론적 가교로 자크 랑시에르에게 기대를 걸었고, 차분한 어조로 그 가능성을 소개했다.

이 고백과 다짐을 담은 부드러운 청유에 대해 이후 지금까지 문학과 정치’, ‘미학과 정치’, ‘미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등으로 변주된 시와 정치주제의 평문들이 불과 3년여 만에 30여 편 가까이 문예지와 학술지 지면에 제출되었고, 이 평문들에 동원된 이론가들만도 20여 명에 육박한다. 특히 자크 랑시에르와 알랭 바디우에 대한 독해가 서로 화학반응을 일으키면서 다양한 해석들을 제출하였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 논쟁은 결국 하나의 숭엄을 다른 숭엄으로 대체하는 운동의 시대가 가고 각 삶과 작품이 생애와 역사의 특정 국면에서 스스로 존중하는 가치를 위해 헌신하는 캠페인의 시대에 이미 돌입해 있음을 보여주었다. , 이 논쟁의 대부분은 운동에 투신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처럼 보였지만, 진은영은 처음부터 지난 시대의 운동의 의미를 회의하며 어떻게를 묻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이 논쟁의 세부들을 제시하고 그 안에서 저 이론가들의 어휘가 어떻게 사용되었는가 헌신적으로 요약하면서 거기에 대한 견해를 표명할 차례인 것 같지만, 전체 논의의 세부적인 결들을 요약하는 일은 생략하도록 한다. 이미 각 입장의 개요를 충실하게 파악한 다른 글들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는 이 논쟁을 정치라는 어휘를 둘러싼 혼란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운동캠페인의 관점에서 재고함으로써 이 논쟁이 실질적으로 드러낸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보고 싶다.

 

 

시와 정치

 

어떤 용어를 언제 사용할 것인가와 관련해서 구체적으로 혼란에 빠지기 전까지는 개념들은 명료화될 필요가 없다.

- 리처드 로티

 

철학이나 문학계에서 사용되는 전문적인 학술 용어들은, 훌륭한 보통 사람들로 살아가는 데에는 별로 필요가 없지만 인문학 학제 내에서 학위를 얻기 위해서는 알고 있으면 유용한 그런 종류의 언어게임이다. 존경할 만한 학문적 관습으로서 각 이론가들과 인문학 내부 여러 영역의 어휘 꾸러미들이 벌이는 언어게임 내에 진입하고 합종연횡을 꾀하는 일은 자기와는 내외부적 환경과 조건이 다른 타자들의 여러 입장과 견해들을 이해하는 유용한 한 가지 방법이다. 그러나 랑시에르의 어휘와 함께 시작된 평문을 나름대로 성실히 이해한 다른 사람이 바디우의 어휘를, 그리고 또다시 랑시에르와 바디우의 어휘를 나름대로 성실히 이해한 또 다른 사람이 아감벤의 어휘를 이용해 대안을 도출하려 하고 이해와 오해가 뒤얽힌 채 이론가들의 어휘 꾸러미를 화폐처럼 교환하면서 결국 시와 정치의 통합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어쨌든) 가능하다는 내용을 각자의 어휘로 이해하게 되는 것은 매우 우회적이면서 수도사의 고행을 본 딴 하나의 신비가 아닐 수 없다. (이 논쟁에서 원활한 화폐 유통을 위해 각자의 화폐를 김수영으로 환전해 가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 논쟁의 대부분은 이런 방식으로 지속되었다. 하지만 핵심은 이 논쟁을 지속시킨 문학 현실의 내적 요인(낯설고 이상한 젊은 시인들의 집단적 출현)이 이미 있었고, 실제 삶 체제 내적 요인들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사건들이 후속하면서 이제껏 없었던 어떤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미학적인 발생(“아름답고 정치적인 것의 야릇한 시작)의 화급한 요구가 생겼다는 사실 자체였다. 어쩌면 그것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나르치스골드문트를 한 몸에 체현하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이었다. 그러므로 지긋지긋하게 반복된 시와 정치라는 어휘 묶음에 관련하여 문제 삼자면, 그것은 이 어구의 의미를 거의 무용해질 때까지 확장하거나 경계를 확정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단어에 포함되어 있는 은밀한 전제가 얼마나 본질론적이거나 유명론적인 세계관을 드러내느냐와 관련될 것 같다. 애초에 제기된 시와 정치의 관계에 관한 고찰이 정치라는 단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더불어 진행되었다는 것은 이 두 세계관 사이의 혼란을 보여준다. 사실 우리가 이 논쟁을 통해 경험한 피로감은 대부분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우리가 얻은 가장 큰 소득 중의 하나도 우회의 기나긴 체감 거리로부터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이 논쟁에서 정치제도로서의 정치’, 삶의 조건으로서 지속적인 갈등을 의미하는 정치적인 것’,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존재 조건으로서의 삶 전체와 관계 맺는 방식’, ‘현실 정치에 대한 직접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충분히 그 확장된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정치학적인 것등 협의나 광의로 축소, 확대가 반복되고 여러 수식어들과 붙어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예측할 수 있듯이 협의정치는 현실 정치를, ‘광의의 정치는 시, 예술, 감각적인(미학적인) 결과물을 배태하거나 포함하거나 제외한 거의 모든 것, (+-)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 논자는 논쟁 초기에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핵심적으로 놓여 있다고 이해하고 시의 참여/시인의 참여, 시와 정치/시의 정치, 정치적 효과/정치적 실재를 구분하여 질문의 구체화를 시도했다. 이 와중에 필연적으로 제기되었던 질문은 시의 정치적 수행성, 즉 효과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다. 예상할 수 있다시피 30여 편의 글들을 통해 진행되어온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그가 정치(적인 것)의 의미가 하나의 답안으로 작성될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시의 정치성을 말할 때 실제 효과를 문제 삼는 것은 답이 아주 많거나, 그래서 답할 수 없는 것을 묻는 것과 같다.”는 언명에서 멀지 않다. 가령, 이장욱은 샹탈 무페의 제안에 따라 정치정치적인 것의 구분을 적용하여 문학적 정치성이라는 용어를 통해 언제나 다른 목소리들과의 갈등과 적대(그러므로 수평적인 사랑) 속으로 힘겹게, 때로는 파괴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투입시키는 시들(가령 김수영, 진이정, 황병승 등)”에 접근하기를 제안하였는데, 이것은 정치라는 어휘가 떠올리는 제한된 현실 정치 상관적인 개념을 확장하기 위한 시도다.

이렇게 되자, “존재형식으로서의 시의 혁명”, “다시 말해 시의 언어는 삶을 직접적으로 쓸 수는 없으나 다만 삶이 처한 시공간, 즉 현실에 대한 잠재적인 부면으로서의 삶의 형식(form of life)을 쓴다.”는 시 형식의 존재론적 입장이 제출되었다. 이것을 욕망의 문제로 번역하면 발화가 욕망의 표현이고, 그 표현이 현금의 제도 안에서 허용되는 감성적 분할과 부조화한다면 이때 이미 여기서 정치적인 사건이 발생한다는 것이라는 언급과 가까워진다. 이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본래 문제의 왜소화에 대해, “미학적인 측면을 고려하면서 시와 정치를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라는 시인의 문제제기와, ‘시는 의도와 무관한 잉여의 지대에서 정치적이다라는 결론 사이에서 정치라는 기표의 의미 변화가 너무 가파르지는 않나하는 물음은 매우 정당한 것이었고, “모든 주제는 시인에게 평등한 것이고 그런 평등의 차원에서 정치성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진은영의 말 또한 경험적으로 옳은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길고 지루하지만 나름의 충실을 다해 진행된 이 논쟁은 시인은 무엇을 원하는가비평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두 개의 실질적이고도 핵심적인 질문에 대답을 보여준신형철과, 이 모든 논쟁의 논점들을 요약하고 정리한 이찬에 의해 일단락된 것처럼 보인다. 신형철은 진은영의 오래된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어떤 시인들은 이미 모험을 시작했는데도 “‘시의 정치가 갖는 특별하고도 예외적인 속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사변적인 논의를 반복하는 것은 좀 답답해 보인다고 토로하였고 예컨대 정치적인 것과 정치학적인 것의 구분을 흐리는 방식으로 정치성의 내포를 한없이 넓혀서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논지에 도달하거나, 시인과 시는 분리되어야 하므로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고민과 시인으로서의 미학적 고민은 서로 분리되어야 한다고만 말하거나, 시는 본래부터 직접적으로 정치적일 수 없고 그러려는 순간 미적으로 실패하거나 미학적으로 퇴행할 것이라고 과도하게 전제하는 일들하지 않는 편이 좋을것이라고 제안하였다.정치라는 어휘의 게임 머니가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공회전이 시작될 시점이 도래한 것이다.

 

 

윤리와 모럴

 

아직 이 논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시간적 거리가 확보되지 않았으므로 확언하기는 힘들지만, 여기에는 문학 장의 사회적 역할 축소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배면에 놓인다. 가령, 1960년대에 네 번에 걸쳐 벌어진 순수-참여 논쟁을 분석함으로써 당시 한국 사회 공론장의 상징구조를 밝히려 했던 한 사회학자는 자신의 작업이 “‘··미의 세 과제에 동시에 대응하는 한국의 지성사를 조명하는 한국적 지식사회학의 시각을 얻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당대의 문학 장이 가지고 있었던 실질적인 사회적 여론 형성의 지대한 힘과 비교할 때 각종 네트워크와 매체들이 이 역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 속에서 문예지 지상에서 벌어지는 논쟁이 그만한 공론장으로서의 대표성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 무리일 것이다. 따라서 문학 매체가 처해 있는 현실적인 조건상 시와 정치논쟁은 광범위한 독자 대중의 독서를 전제로 한 지식인 문필가들 사이의 입장 충돌이라기보다는 문학 장 내의 창작자와 비평가들이 처한 현실적인 문학 활동 방식에 관한 스스로의 검증에 가까웠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사실상 이 지루한 우회를 실행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논쟁에서 가장 유용한 결론이자 정치의 개념 정의를 둘러싼 지리멸렬한 공방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일 것이다. 이 시행착오로 인해 앞으로 당분간은 갖가지 본질론적인 전제들을 은밀하게 뒷받침하는 시와 정치공방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기대를 가지게 해주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기실 진은영이 시와 참여의 문제를 인간의 감성·감각적인 부문과 이것을 ()분배하는 활동으로 설명하는 랑시에르 모델에 동의했을 때, 이 문제는 이미 인문학의 핵심 대상인 인간의 감성과 실천을 본질론적으로 끌고갈 위험성을 지니고 있었던 반면, 진은영 자신은 이 논쟁에서 제출될 다양한 해석과 실천의 방향들을 이미 선취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학(감성론)의 정치와 정치의 미학(감성론)사이의 적절한 상관성을 정립하기 위한 기준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으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미학적 실험은 예술과 정치라는 서로 이종적인 것들을 결합하는 다양한 방식에 대한 상상이라 스스로의 질문에 대답했던 것이다. 그가 자문의 형태로 물음을 제출할 당시 같은 텍스트 안에서 내리고 있었던 잠정적인 결론은 텍스트들간의 얽힘과 직조를 만들어내는 것은 문학 텍스트와 다른 사회적 텍스트의 끊임없는 접합이며, “이 이질적 접합의 지속적 가능성을 예술가가 자신의 삶 속에 마련해주지 않는 한, 문학적 발명이 충분히 새로워질 수 없고, 따라서 삶과 정치가 실험되지 않는 한 문학은 실험될 수 없다는 명제였다. 그것은 그의 진지한 실존적 고민의 토로와 그에 따른 굳은 다짐의 고백이었으며 그는 실제로 이 명제를 고민하며 철학자로서, 창작자로서 계속 실천해 나가고 있다. 다짐에 공감과 동의를 표하거나 보론을 첨가함으로써 동료 인간 서로의 용기를 북돋는 것 이외에 시란 무엇인가’, ‘정치란 무엇인가’, ‘시와 정치는 어떻게 통합되어야 하는가등의 본질론적인 물음은 시인의 결심을 노쇠한 진영 이론의 간판으로 내걸거나 시 형식의 존재론이라는 탈색된 진술 유형으로 번역하여 결국 문학의 모든 것에 대한 각 어휘 목록 간의 갈피 없는 공방으로 번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대답들은 한결같이 시와 정치의 통합은 수동적이거나 적극적인 방식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진은영은 이 논쟁을 통해 얻은 시와 정치의 새로운 방식의 통합 가능성에 대한 깨달음을 학문적인 성과의 방식으로 제출하였다. 시와 정치: 미학적 아방가르드의 모럴은 주된 미학, 정치, 윤리의 관계 설정 모델을 우선 설정함으로써, 랑시에르의 논의를 좇아 (전통철학의 고전적인 분류법에 따라 사회의 습속과 행동 방식을 의미하는) '윤리(ethics)'에 언제나 도전적일 수밖에 없는 모럴(moral)’(“선과 악에 대한 관습적 해석들에 대항하여 새로운 감각적 분배를 만들어내는 정치적 활동)을 제시한다. 이 모델에 따르면, “문학은 어떤 구획이나 경계를 불변하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고, 항상 자신과 비문학적인 것으로 규정된 것들 사이에서 진동하면서 기묘한 것을 형성해내는 방식으로 자신의 모럴을 실현한다.” 랑시에르에게 있어 한 사람의 노동자 시인은 자본주의 경제 구조 속에서 경제적으로 무용한 활동을 통해 기존의 감각적 분배에 균열을 일으키고 불일치를 조장한다. 그 구체적인 침입자의 미학적 모럴이 실현되는 순간을 진은영은 알랭 바디우의 󰡔비미학󰡕을 빌려 필기구를 벗어난 시의 이중의 시작(始作), 시는 쓰여지기 이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다는 데서 찾는다. 여기에서 도출되는 가장 중요한 결론, “시에는 이러한 이중의 시작이 있다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시 창작에서 시인과 비시인의 활동을 구분할 수 있는 어떤 명료한 경계선은 없다. 그러한 구분은 우리가 편의상 구분한 시의 두 번째 시작에서부터 시와 관계할 수 있는 자리(비평의 자리)에서는 명확할 수도 있겠지만 시인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구분이다.” 따라서, 시인과 비시인, 시의 시간과 정치적 활동의 시간에 인위적 구분을 부여하는 순간, “거기에는 모종의 비도덕성이 존재한다.” 거기에는 어떤 식으로 세계가 재현되어서는 안 된다는 금지의 명령이 있기 때문이다.”

진은영이 랑시에르의 이론을 좇아 도달한 이 결론은 시와 정치논쟁 내내 은밀히 전제되어 있었던 시인/시민, /(광범위한 정치적 활동을 포함한)삶 구분의 인위성을 드러내줄 뿐 아니라, 삶과 이론을 대하는 방식 사이의 어떤 대립의 흔적도 내포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운동과 캠페인

 

나는 이 윤리모럴이 수행되어 외화하는 양태를 운동캠페인이라는 로티의 비유로 프래그머틱하게 설명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여기에서 프래그머틱하게라는 말을 쓴 이유는 첫째, 모든 논쟁이 기본적으로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언어들의 논쟁 내 용법이 일으킬 수 있는 혼란을 제거하는 데에 우선 관심을 기울인다는 뜻이고, 둘째, 어떤 경쟁적 이론이나 주장들을 통한 논쟁이 정말로 기대되는 바람직한 실제 행동이나 결과를 낳는가에 중점을 둔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운동캠페인이라는 용어는 경쟁적 논변들의 세부를 지나치게 세밀하게 탐사하여 결국 시는 자율적이기도 하고 정치적이기도 하다라는 모두가 자기 식으로 알고 있는 무의미한 결론에 도달하는 대신, 이 논쟁에 부과된 열기가 정말로반영하고 있었던 실제 심리적 기대지평의 결과를 보여주기 위해 차용한 것이다.

로티는 정치 사상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에서 개량적인 사회민주주의자로 전향한 것처럼 평가되고 있었던 어빙 하우(Irving Howe)의 생애에 관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10년 동안 이 잡지(하우가 편집장으로 있었던 <디센트>-인용자)와 <파티전 리뷰>의 차이는, <디센트>와 그 잡지를 중심으로 모여든 작가들이 반드시 어떤 운동의 회원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점이다. 그들은 단지 많은 캠페인에 참여하는 것에 만족했다. 내가 사용한 캠페인이란 의미는 제한적인 어떤 것즉 성공했던 것으로 인정될 수 있거나, 아니면 여태껏 실패했던 것으로 인정될 수 있는을 말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운동은 성공한 것도 실패한 것도 아니다. 운동은 그처럼 단순한 것을 하기에는 너무나 방대하고 무정형적이다. 운동은 키에르케고르가 무한을 향한 열정이라고 부른 바를 공유하며, 그리스도교와 마르크스주의 같은 것이 운동의 예들이다.

 

로티가 하우의 생애를 캠페인이라고 표현했을 때, 그것은 운동보다 더 바람직하다거나 비겁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단지 운동의 숭엄에 열광하는 것과 캠페인의 세목들에 헌신하는 것 중 더 중요한것은 없으며, ‘캠페인의 삶을 선택한 하우의 정직과 그의 높은 헌신도도 운동의 숭엄에 몸을 바친 성자-전사(saint-warrior)’의 삶만큼이나 훌륭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모든 삶은 나름대로 성공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조악한 운동원이나 비창조적이고 불성실한 캠페인 참여자도 얼마든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운동이 운동원에게, 가령 자신이 어떤 종류의 무한한 숭엄에 온 생애를 바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시인에게 어떤 식으로 세계가 재현되어서는 안 된다는 금지의 명령을 내리거나 이 명령을 수정함으로써 원칙을 개정하여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분명히 할 수 없을 때, 운동은 무한히 지속될 자격을 잃고 단지 하나의 캠페인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문제는 시적 자율성인가 정치적 양심에 따른 재현인가가 아니다. 시에서도 얼마든지 양심이 작동하고, 정치에서도 자율적인 행위들이 창조적으로 생산될 수 있다. 이것은 격문에 가까운 시를 쓰는 시인이나 시를 읽는 정치인처럼 소박한 결합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치적 양심을 부르짖는 시를 (/) 쓰면서 비겁한 시인이 있을 수 있고 (/못 쓴) 시를 읽는 추악한 정치인도 있을 수 있다. 상황은 그대로다. 낡은 어휘들과 함께 혼란스럽게 진행된 시와 정치논쟁에 정말로 새로운 것이 있었다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운동으로 생각해온 시간이 우리에게 드리운 그림자가 아직까지 미치고 있는 영향(이것이 모종의 죄책감의 근원이다. 운동이 다른 운동으로 대체된 것처럼 보이고 무한이 유한으로 드러날 때, 운동원은 자기의 죄를 고백한다. 우리는 후일담 소설과 많은 80년대 시인들의 ‘()전향적인시를 통해 이것의 미학적인 재현을 목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다른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하고 있음을 목도한다는 사실이었다. 시가 정말로 온몸으로 수행된다면, 그 몸의 변화는 사상과 체질의 총체적인 이행를 의미한다. 다른 종류의 윤리가 숭엄의 그늘을 드리우는 것에 대한 반발은 이미 현실화되고 있었다. 정치가 퇴행했을 때 시는 이미 버린 몸을 다른 방식으로 입거나 입지 않을 수 있다. 다만, 누군가 그것을 치욕으로 생각한다면, 그는 캠페인을 운동으로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캠페인과 마찬가지로 생애도 당대의 다른 사람들의 생애와 캠페인으로부터 자극과 열광을 빌려올 수 있거나, 아니면 당대의 다른 사람들의 생애와 캠페인과는 대립함으로써 스스로를 규정할 수도 있다. 이것이 사회정치적인 제휴와 투쟁뿐 아니라 예술적인 제휴와 투쟁도 존재하는 이유이다.”생애로 대체해도 그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캠페인 참여자는 스놉인가?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나 조르조 아감벤의 <열림: 인간과 동물(The Open: Man and Animal)>포스트 히스토리의 인간을 동물과 속물로 구분하려 시도한 코제브의 헤겔 독해에 주목하면서, 국내에서도 1987년과 1997년을 결절점으로 삼고 이 시기 전후를 진정성과 그 안티테제로서의 포스트 히스토리의 머리 없는 주체-동물과 스놉의 심성 구조로 이해하려 한 김홍중, 심보선 등 사회학자들의 시도가 주목을 받았다. 다분히 세대론적 관점이 용해된 사회학적 논리에 따라 재서술하게 될 때, ‘시와 정치논쟁을 운동캠페인의 비유에 따라 읽는 필자의 독법이, ‘진정성스노비즘의 다른 개념 쌍으로 번역될 우려가 있다는 지적에 관해서는, 우선 담론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를 지적하고 싶다.

캠페인과 스노비즘의 용어 사용에 있어 태도의 차이를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스노비즘이 성전(聖殿)에서의 지루한 라틴어 미사를 정신적 장식품으로 삼는 속물이 되거나 성전을 뛰쳐나가 시장의 발랄함에 자기의 몸을 맡기고 동물적 쾌락에서 행복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면, 캠페인은 교리가 경험적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 지점에 대해 토론회를 벌이고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지역어로 미사 형식을 바꾸거나 행복의 의미 내용에 관한 경험담을 나누고 견해를 첨가 및 수정하는 간담회를 개최하는 실제 행동을 의미한다. 내가 이 글에서 캠페인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의미하고자 한 것은 갈등을 피하고 양심을 기만적으로 위무하기 위해 탈퇴한 운동원들이 벌이는 전시성 유사-운동(pseudo-movement)이 아니라 실질적인결과들을 산출하기 위해 인간의 유한성을 포용한 사람들이 벌이는 (무규율이 아니라) 규율 창조적인 시도들이다. 이런 측면에서 성패 여부에 대한 판단을 무한히 미래로 지연하는, 영원성에 기반한 운동과 지속적이고 의지적인 시도들을 의미하는, 인간의 유한성에 기반한 캠페인중 더 훌륭하거나 저열하다고 가치 판단할 자격을 부여해주는 그 어떤 본질적인잣대는 없다고 가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1987년 체제에 관한 한, 시에 있어 운동에 대립하는 캠페인의 장면을 예로 든다면, 그 최초의 유의미한 시도는 시청 앞에서 넥타이 부대의 행진이 벌어지기 직전과 직후, 장정일이 잇달아 출간한 <서울에서 보낸 3주일>과 <햄버거에 대한 명상>, <길안에서의 택시 잡기> 등의 시집들에서 도드라진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를 억압과 획일성 아래 규율해온 독재 정권에 맞서 체제의 변화를 요구한 87년의 민주화 운동과 그 중심적 주체로서 이른바 386 세대가 표상하는 진정성이라는 정신적 가치에 대하여 우리들은 잃어버린 것이 없다 / 모든 것은 너희들이 분실했으므로라고 쓰고 세계는 머리가 텅 빈 거대한 껍질에 / 지나지 않는다”(텅 빈 껍질, <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사, 1987)고 쓰고 있는 장정일은, 취향에 대한 강조, 금기 위반적인 욕망의 전시, ‘(진정성에 가득 찬) 80년대 시인들에 대한 조롱 등 자신의 시들이 보여주고 있는 여러 가지 특성들로 인해 스놉으로 불릴 모든 자격을 갖춘 것 같지만, 실은 진정한 인간적 삶이 우선 토대로 갖추어야 할 개체성에 대한 존중을 잃어버리고 머리만 비대해진 거대 이데올로기 중심의 대책 없는 낭만주의 지향에 대해, 반민주적인 독재 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그에 대항하는 당신들도 역시 속물’, ‘머리 없는 역사 이후의 인간이라고 유한한 인간의 입장에서 비판하고 있는 듯하다. 이때 진정성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나는 그가 2000년대 젊은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당시에 변종이나 이단아로 취급받았지만, 사회 모든 부면에서 지배적이었던 당대의 사회과학 중심주의 하에서 이데올로기 대() (의사)전통이라는 운동 대() 운동의 시적 패러다임을 벗어난 흔치 않은 문제적 캠페인의 개최자였다고 생각하고, 사실상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의 중심인물들 중 하나인 황병승이 이 캠페인의 적자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유한성을 포용한 인간의 관대함이 가벼움과 혼동된다고 해서 캠페인적 삶을 스노비즘의 동물적 쾌락이나, 텅 빈 내면을 온갖 허영으로 치장하는 속물에 비유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 될 것이다. 지성사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그것은 오히려 유한성의 자각이라는 측면에서 니체 이후 실존철학과 친연성을 가질 테지만, 이런 계보를 그림으로써 결과적으로 플라톤 대() 니체의 대결 구도라는 낡은 용어로 이 국면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으며, 설령 설명할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플라톤과 니체 중 하나를 실제로 선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용어 상 운동진정성을 연상시킬 수는 있지만, 앞서 언급했듯, ‘운동캠페인은 가치의 우열을 부과하는 계사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반복되어온 것처럼 보이는 두 경향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한 메타포이므로, ‘운동-진정성’, ‘캠페인-스노비즘식으로 기계적으로 연결할 필연성은 어디에도 없다. 보다 분명하게 이야기하자면, 진정성이 결여된 운동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며, 진정성으로 똘똘 뭉친 캠페인 참여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느 쪽도 본질적으로 바람직한 운동원이나 캠페인 참여자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제임스 조이스의 자전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스티븐 디덜러스가 사제의 길을 포기하고 작가가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을 두고 나는 그가 운동보다는 캠페인에 헌신하기로 했다고 비유적으로 말할 수 있지만, ‘그가 진정성을 잃고 스놉으로 전락하였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

이 글에서 시도한 프래그머티즘적 방식의 우선적인 목표는 당면 문제가 정말로 문제인지 판단하기 위해 경쟁적 견해들을 정립하는 교통정리이며, ‘무엇이 올바른 선택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현실적인 오해들을 (완전히 걷어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약분해내는 것이 실질적인 다음 행동을 이끌어낼 것이라는 취지에 의한 것이다. 한국 사회의 근 과거-현재를 사로잡고 있는 마음의 사회학적 성찰 도구로 제안된 진정성스노비즘이라는 용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논구는 이 글의 당초 목표였던 시와 정치논쟁의 실질적인 심리적 기대지평을 이해할 또 다른 유형의, 보다 세대론적이고 문화 사회학적인 지형도를 제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분히 적대적인 이 개념 쌍은, ‘운동캠페인의 메타포를 통해 의도했던, 실제로 가능한 결과를 도출하고자 하는 프라그마 중심의 시각을 심각하게 벗어난다. , 그것은 시와 정치논쟁에 관한것이 아니라 시와 정치논쟁의, 가치를 서열화하는 또 다른 국면이 될 것이다. 그도 역시 유의미할 수 있을 테지만, 이 글의 목표는 아니다.

 

 

다시, 동경백색집단

 

그렇다면, ‘동경백색집단은 어떻게 되었는가? 나는 이 논쟁을 통해 도저한 실험적 퍼포먼스가 어떤 실질적인 사회 변화를 수반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발견하였는가? 그것은 성공한 캠페인인가, 실패한 캠페인인가? 그러니까,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은 어디로 어떻게 가고 있는 것인가?

나 역시 김수영이라는 화폐를 빌려 사용하자면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왔다. 캠페인은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며 적절한 자기 형식을 스스로 찾아가는 동안, 이 실패와 성공을 목도하는 자들의 경험의 체적 속에 서서히 그 독법을 체화시킨다. ‘동경백색집단은 아마도 와해되었을지도 모르고 다른 방식의 퍼포먼스를 다른 곳에서 펼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10년 남짓 지나는 동안 플래시몹은 익숙한 단어가 되었고, ‘미래파환상파도 손때가 묻었다. “낡은 문제에 대한 해결은 참신한 문제를 제기하며, 이 과정은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사회와 종()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에 있어서도, 성숙한 단계에 도달할 때마다 새로운 딜레마를 창조함으로써 이전의 딜레마를 극복하게 될 것이다.”

많은 다른 사변적인 이론들의 언어게임과 마찬가지로 시와 정치논쟁은 우리가 욕망과 당위와 논리를 혼합해버렸을 때 빠지기 쉬운 몇 가지 유의할 점들을 가르쳐주었으며, 정치권력이 벌이는 끔찍함이 우리로 하여금 촉발하는 실천적 정체성에 대한 화급한 요구(와 그것의 반대급부로 불러일으켜지는 반발)를 확인하게 해주었다. 말하자면, 창조적인 상상력을 추구하는 자(광의의 시인)가 다른 텍스트들을 읽는 방식은 순복음주의자가 사해 문서를 대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 우리가 운동의 그림자에 압박되지 않는 (언제나 이미 있어온) -삶의 진화 가능성을 점점 더 믿어가고있다는 것이다. 운동이 숭엄을 다른 숭엄으로 대체하는것과 달리, 그리고 자율성의 존재론적 신화가 시를 여러 오독의 고독 속에 빠뜨리는 것과 달리, 캠페인(의 활력)은 그때그때 헌신적 참여의 의향에 대해 세례문답과 같은 사상검증이나 옳고 그름, 진리/비진리라는 판단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캠페인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것이 단지 자기 자신에 국한되는) 아주 조그마한 변화라 할지라도 상황이 더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쪽에 희망을 건다. “실현된 운동의 불순성은 자기 자신을 운동과 동일시하는 사람을 파괴시킬 수 있지만, 캠페인의 불순성은 무난히 해결할 수 있다. 그 같은 불순성은 유한하고 한정된 것을 기대하는 사람의 것이다.” 경전이 없는 자에게는 불경죄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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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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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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