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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Indimina  론 울프* 씨의 혹한 론 울프 씨가 자기 자신을 걸어 나와 불 꺼진 쇼윈도 앞에 서자 처음 보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하나의 입김으로 곧 흩어질 것 같은 그의 영혼. 그러나 이 순간 그는 유일무이한 대기의 조각으로 이 겨울을 견디고 있다. 그의 단벌 외투를 벗겨간 자들에게 그는 반환을 요구할 의사가 없다. 처음부터 외투는 그의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 겨울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는 친구가 셋 있었는데 하나는 시인, 하나는 철학자 그리고 자기 자신이었다. 그들은 자존심이라는 팬티만 걸치고 혹한을 견디려는 그의 무모한 결심을 존중해주었지만, 이 존중이 그의 저체온증을 막아주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는 스테판에게 말했었다; 저 육각의 눈 결정이 아름답다면, 보이지 않는 내 영혼의 아름..
김영승 선배님, 공개된 지면에 편지를 쓰라는 분부를 받고 이 편지를 쓰기까지 저는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남들이 볼 걸 뻔히 알면서 쓰는 편지에는 도대체 무슨 내용을 담아야 할까요. 그래서 마감 기한 최후통첩을 받고도 한참을 지나 선배님 단 한 분만 읽는다 치자 결심하고서야 겨우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선배님은 저를 모르시겠지만 저는 선배님을 20년 전부터 압니다. 고등학교 입학하자마자 들어간 문예반 반실에 놓여있던 날적이에 추상같은 2학년 선배가 어여쁜 글씨로 적어놓았던 「반성641」을 읽고 나서, 저는 반실 책장에 꽂힌 선배님 시집을 들고 학교와 집을 오가며 참 불온한 말들을 낄낄거리며 열심히 읽었더랬습니다. 굴헝같이 습하고 어둡고 서늘해서 이상하게 아늑한 문예반실에서, 동기들과 겨울이면 곱은 손가락을 호호 불며 갱지..
동지, 자네의 섬뜩한 농담은 내 손이 호주머니 속을 더듬게 해 그러니까, 우리가 장난이나 한번 쳐볼까, 하고 모였던 것은 지난겨울의 일이었다. 나는 거의 우연을 가장한 운명의 방식으로 (아니, 운명을 가장한 우연의 방식인가?) 그와 함께 동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동인 활동이란 건 대체 무엇인가? 한 30년 전쯤이라면 역사적이고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문학적인 대의명분이라도 있었겠지만, 시의 시대도 지나가고, 가시적인 적들의 적성(敵性)은 단물처럼 대기에 비가시적으로다가 녹아들고, 나름 교체된 정권도 한동안 살아보고, 지금은 상냥한 얼굴로 뒤통수를 쳐대는 교활한 적의 품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그래서 결론적으로 온갖 고민들이 문화적인 형태로 세련되고 교양 있는 취미의 자원을 이루게 된 지금, 21세기 시작하고 한 10년 지난 다음에 축구단이나 야구단도 아니고 동호회..
소설가 곰치 씨의 분신(들) 소설을 쓰자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김언 (민음사, 2009년) 상세보기 30년쯤 전 김수영은 죽기 전에 쓴 그의 시론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지 시를 논하는 사람이 아니며,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그는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다”라고 쓰고선, 막상 시의 형식-예술성/내용-현실성 논의에 들어서자 “나는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쓰고 있다”고 쓴다.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쓴다는 것’에 부연하듯 덧붙인 말은 이것이다. “그만큼 많은 산문을 도입하고 있고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유가 없다.” 소설을 쓰듯 시를 쓴다는 말은 내용-현실성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알다시피, 그의 시론의 주제인 ‘온몸’은 형식과 내용이 분리되지 않..
기분의 유량통제시스템 우리들의 진화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이근화 (문학과지성사, 2009년) 상세보기 세상에는 자전거를 못 타는 기분도 있다 송곳니가 반짝이는 이상한 기분은 송곳니로 찌르는 이상한 기분으로 위로할 수 있지 -「송곳니」 2연 우리의 사회화된 감정은 대개 무엇에 울고 웃고 화내야 할지 상당 부분 교육된 결과다. 공생활 내에서 우리는 대충 어디서 어디까지가 우울이며 불안이며 공포며 명랑인지 비교적 선명한 스펙트럼을 갖는다. 그 안에서 울고 웃고 떨고 소리 지른다. 는 이 스펙트럼의 선명성 안에서 이해하기 힘들다. 수렴할 수 없는 미묘한 뉘앙스, 차이들에 시인은 사로잡힌다. 이름이 없으나 실재하는 ‘이상한 기분들’, 기분은 감정의 조짐처럼 다가온다. 12음계나 색상표를 들이대어보아도 이 이상한 기분에 딱 맞는 ..
삶=똥, 몰수당한 청춘의 알리바이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박후기 (창비, 2009년) 상세보기 박후기는 삶이 일종의 ‘덤’이나 짐이라는 부채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시에서 배설물이 등장할 때마다 그것이 생산의 지점과 동일한 장소를 의미하고 있다는 것은 아마도 그 징후일 것이다. 「채송화」에서 “무너진 집안의 막내인 나는/가난한 어머니가/소파수술비만 구했어도/이 세상에 없는 아이/.../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엄마는 아무 때나/울타리 밑에 쪼그리고 앉아/오줌을 누었다/죽은 동생들이/노란 오줌과 함께/쏟아져나왔다”라고 쓸 때 태어나지 않을 뻔 한 시적 화자의 느낌은 ‘죽은 동생들’과의 동일시 직전까지 가고, 「꽃 진 자리」에서는 “사과에겐/꽃 진 자리가 똥구멍이다/꽃 진 자리에 유난히/주..
고영, 오은 서평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고영 (문학세계사, 2009년) 상세보기 타자(他者)이며 타자(打者)인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중년 남자의 비애란, 그의 삶이 가족과 사회에 바쳐지고, 그 헌신을 위해 자기 자신의 사감(私感)들을 오롯이 감당하고, 평생의 노동이 그를 외면한 채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리라는 (확실한) 예감과 떨어뜨려 생각하기 힘들다. (「은자(隱者)」에서 그가 쓰고 있듯, 죽어서 비로소 은닉될 수 있었던 익명적 주체에게, 죽음과 대응항인 삶은 “자해의 흔적인지, 타살의 단서인지 도저히 밝힐 수가 없는” 노동의 흔적으로 치환된다.) 사랑이 많은 남자에게 이 비애는 유독 깊다. 사랑은 모든 국지적인 문제를 전면적인 번민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보편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유명한 영희에게서 투명한 앨리스에게로 앨리스네 집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황성희 (민음사, 2008년) 상세보기 세계는 완벽하다. 당위성이 빠지면 세계는 그 자체로 완벽해진다. 혹은 공유되(고 있다고 믿어지)는 당위를 수긍하고 난 뒤의 세계는 나름대로 완벽하다. 그런데 완벽이란 게 대체 뭐지? 그건 그냥 그대로 있음, 자연(自然) 아닌가? 유대인들의 신 ‘야훼’의 본래 뜻처럼, ‘스스로 그러한’ 것, 무수한 ‘-임’, Be 동사의 모든 주어들. ‘더 높은 곳’이 없는 이곳에서, 신성은 하향 평준화되고 만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어찌됐든 완벽하다. 그것은 ‘결국 모든 것은 좋은 것’이라는 실용주의의 명제가 세계화되는 자리, 과거의 모든 사건이 정당화되는 자리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돌이킬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야 한다’던 80년대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