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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의자" 의자 황인찬 여섯 살 난 하은이의 인형을 빼앗아 놀았다 병원놀이를 하기 위해서였다 인형은 나의 의사선생님이었다 나는 선생님께 아프다고 말했다 어디가 아프냐 물어도 아프다고만 선생님은 내게 의자에 앉으라 하셨다 의자는 생각하는 의자였다 앉아서 생각해보라고, 잘 생각해보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실 때, 나는 울어버렸다 무서워서 너무 무서워져서 - 2011 겨울
2011 아시아 시 페스티벌 발제문) 아시아는 어디에 있는가 인류는 이제 단일재배를 개시하려 하고 있다. 인류는 마치 사탕무를 재배해내듯 문명을 대량생산해낼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 인류의 식탁에는 오직 그 요리뿐이리라.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힘의 탐구」, 슬픈 열대 아시아 시 교류 심포지움의 발제문을 청탁받은 후 저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아시아가 어디에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화적인 권역 개념으로 생각하자니, 중동 아시아와 서남 아시아, 중앙 아시아, 동남 아시아, 동북 아시아 사이의 문화적인 차이는 건너뛸 수 없을 만큼 넓은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대륙 개념으로 생각하자니 유럽과 아시아가 어디에서 나누어지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아시아’라는 말은 대충 ‘비(非)서구’를 가리키는 말이 ..
A. Corelli, Christmas Concerto Op. 6 No.8
무(無)의 두드러기에 대한 명상 처음 시를 썼던 때를 나는 결코 잊지 못한다. 그것은 1987년 6월의 어느 날이었고, 학교에서 돌아와 아무도 없는 집에서 작은 치자 화분에 깔린 이끼 위를 기어다니던 민달팽이를 꼼짝없이 한 시간쯤 들여다본 후였다.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이 단순한 생물은 그토록 느린 속도로 젖은 이끼 위를 돌아다니며 화분을 빠져나갈 생각 같은 것은 하고 있지 않았다. 집이 없구나, 너도. 이렇게 혼자인데 말이지. 연무가 깔린 뿌연 대기는 온화하고, 오후 네 시의 햇빛은 알맞게 익어 평온이랄지 나른함이랄지 느리게 유동하는 어떤 집중된 정서가 나를 일종의 명상 상태로 몰아넣었다. 어린아이들이 종종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이때를 생각한다. 그럴 때 아이들은 온몸으로 명상 중이다. 살갗에 열려 있는 ..
허수경,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문학동네, 2011) 기차역에 서서 허수경 어쩌면 당신은 그날 기찻길에 놓여 있던 시체였는지도 어쩌면 달빛이 내려앉는 가을 어느 밤에 속으로만 붉은 입술을 벌리던 무화과였는지도 어쩌면 당신은 막 태어난 저 강아지처럼 추웠는지도 어쩌면 아직 어미의 자궁 안에 들어 있던 새끼를 꺼내어서 탕을 끓이던 손길이었는지도 지극하게 달에게 한 사발 냉수를 바치던 성전환자였는지도 어쩌면 이렇게 빗길을 달리고 달려서 고대왕국의 무너진 성벽을 보러 가던 문화시민이었는지도 당신은 나는 먼 바다 해안에 있는 젓갈 시장에 삭은 새우젓을 사러 갔던 젊은 부부였는지도 그 해안, 회를 뜨고 있던 환갑 넘은 남자의 지문 없는 손가락이었는지도 어쩌면 당신은 그날 그 여인숙이었는지도 세상 끝에는 여인숙이 있다는 거짓말에 속아 멀리멀리 끝까지 갔다가 결국 절벽에..
김수영의 시 ‘그것을 위하여는’ 발굴 한겨레 원문기사전송 2011-11-28 12:15 최종수정 2011-11-28 20:15 관심지수0글씨 확대글씨 축소 [한겨레] 문승묵씨, 53년 발표작 찾아 전쟁후 삶 그린 12연59행 장시 그동안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던 김수영(작은 사진)(1922~1968)의 시 이 발굴되었다. 다음주 창간되는 계간 문예지 겨울호는 1953년 10월3일치에 실린 김수영의 장시 (큰 사진)을 발굴해 전문을 소개했다. 서지 연구가 문승묵씨가 찾아내 에 소개한 이 작품은 전체 12연 59행의 비교적 긴 분량으로 그동안 전집을 비롯한 그의 어느 시집에도 수록되지 않았던 작품이다. 이 작품이 발표된 시점은 김수영이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뒤 부산에서 잠시 교사 생활을 하다가 잡지사 근무를 위해 서울로 올라가던 어름인 것으..
<현대문학> 2011년 10월호 * 기억해둘 만한 글들; - 최수철 소설 "변신-사랑의 알레고리 2" (아무래도 나는 알레고리를 사랑한다.) - 정명환 선생의 "인상과 편견" 10회 (내가 공감을 표하는 이분은 29년생.) - 해외문학 란에 이나경 번역으로 실린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화 "그림자Skyggen" (미친듯이 공감을 표하는 이분은 1805년생. 가끔 나는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 존재하기 시작할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있었던, 단 한 명도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지 않은 과거라는 타국에서 쓰인 글들이 지금 살아 있는 어느 누구의 글보다 참말처럼 여겨지고 감동적이라는 사실이 아주아주 이상할 때가 있다. 거기는 외계나 다름 없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죄 기록들뿐인데. 저 이방의 말들이 어째서 여기, 나의 세계에서보다 ..
어딜 가도 대전에 하루 일찍 내려왔다. 학술대회 토론 건. 한 달쯤 남아 있는 카드 쿠폰으로 호텔에 혼자 체크인을 하고 들어올 때까지 난 그저 다른 곳에 있고 싶을 뿐이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과 TV와 우울. 어딜 가도 이것들이 있다. 아무것도 다르지 않다. 온천물에 몸을 담그어도 어제처럼, 그제처럼, 여전히 두통과 몸살. 무언가 부족하다. 무언가 중요한 것이. 무언가 거대한 것이. 글은 쓰이지 않는다. 겨우 오늘, 안간힘을 써서 이 일기를 남길 뿐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에 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 한다. 계속 안간힘을 쓰자. 할 수 있는 것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