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역에 서서 허수경 어쩌면 당신은 그날 기찻길에 놓여 있던 시체였는지도 어쩌면 달빛이 내려앉는 가을 어느 밤에 속으로만 붉은 입술을 벌리던 무화과였는지도 어쩌면 당신은 막 태어난 저 강아지처럼 추웠는지도 어쩌면 아직 어미의 자궁 안에 들어 있던 새끼를 꺼내어서 탕을 끓이던 손길이었는지도 지극하게 달에게 한 사발 냉수를 바치던 성전환자였는지도 어쩌면 이렇게 빗길을 달리고 달려서 고대왕국의 무너진 성벽을 보러 가던 문화시민이었는지도 당신은 나는 먼 바다 해안에 있는 젓갈 시장에 삭은 새우젓을 사러 갔던 젊은 부부였는지도 그 해안, 회를 뜨고 있던 환갑 넘은 남자의 지문 없는 손가락이었는지도 어쩌면 당신은 그날 그 여인숙이었는지도 세상 끝에는 여인숙이 있다는 거짓말에 속아 멀리멀리 끝까지 갔다가 결국 절벽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