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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 context

허수경,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문학동네, 2011)



기차역에 서서


                                                  허수경

 어쩌면 당신은  그날 기찻길에 놓여 있던 시체였는지도

 어쩌면 달빛이 내려앉는 가을 어느 밤에
 속으로만 붉은 입술을 벌리던 무화과였는지도

 어쩌면 당신은 막 태어난 저 강아지처럼 추웠는지도
 어쩌면 아직 어미의 자궁 안에 들어 있던 새끼를 꺼내어서 탕을 끓이던 손길이었는지도
 지극하게 달에게 한 사발 냉수를 바치던 성전환자였는지도

 어쩌면 이렇게 빗길을 달리고 달려서 고대왕국의 무너진 성벽을 보러 가던
 문화시민이었는지도 당신은
 나는 먼 바다 해안에 있는 젓갈 시장에 삭은 새우젓을 사러 갔던 젊은 부부였는지도
 그 해안, 회를 뜨고 있던 환갑 넘은 남자의 지문 없는 손가락이었는지도

 어쩌면 당신은 그날 그 여인숙이었는지도 세상 끝에는 여인숙이 있다는 거짓말에 속아 멀리멀리 끝까지 갔다가 결국 절벽에서 뛰어내린 실업의 세월이었는지도

 무심한 소나무였는지도 아직 흐르지 못한 음악이 살얼음처럼 끼어 있는 시간
 설레며 음악의 심장을 열어 핏줄을 들여다보던 어린 별이었는지도 

 당신은 그랬는지도 우리가 멀리서 보이지 않는 서로의 몸을 향하여
 입을 맞추려고 할 때마다 사라지는 정신이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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