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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review

'생명-폭력'과 그 숙주들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김기택 (창비,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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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金基澤)의 시선은 이번 시집 『껌』(창비 2009)에서 더욱 집요해졌다. 그의 시선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독자로서는, 그가 눈 돌리지 않는 이상, 먼저 눈 돌릴 수 없다. 그의 시각적 집요함이 나의 시선을 끌고 들어갈 때, 평범하던 풍경이 별안간 투명한 살갗 안의 핏줄과 근육과 뼈로 화해 거꾸로 나를 응시하는 것을 느낀다. 대상은 평소의 모습을 벗고 뒤틀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대상이 지나치게 가까이 와 있다는 증거이리라. 이 만남은 일종의 폭력적 상황을 통해서만 성사된다. 실재는, 그 있음을 은폐할 때에만 우리에게 평온하고 상식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므로. 그로부터 불편한 진실들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이 진실들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사건 현장의 핏자국처럼 종종 어떤 부채감을 동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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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은 바로 이 평온하고 상식적인 삶의 막(膜)을 들어내어 그 밑에서 끊임없이 꿈틀거리고 흘러다니고 아우성치는 입 없는 피와 근육과 뼈의 세계를 보여주는 데 골몰한다. 이 날것의 세계를 시적으로 형상화한다는 것은, 숨겨진 채 삶을 가능하게 하는 실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생명의 신성성에 대한 경이와 찬탄의 의미를 지닌다”고 이야기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는 이번 시집에서 드러나는 생명의 무차별적이고 폭력적인 모습들과는 적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십여년 전 그는 “폭력에 의해 생명이 어떻게 왜곡되는가” “본능이 가장 극단적으로 억압된 상황 속에서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이런 문제들이 흥미롭게 느껴지곤” 한다고 했는데, 최근 시집에서는 폭력과 생명이 분명한 대립항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그리고 생명의 필연적 형식인 시간) 그 자체가 폭력적 본성을 품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가 보여주는 사물의 응시에 대한 독자들의 경이와 찬탄은, 너무나 밀접해서 기괴해진 사물들에 압도되는 경험으로부터 온다. 이 기괴한 사물들은 ‘나’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나’와 즉각적인 자리바꿈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공포의 예감을 드리운다.

그의 시를 문명 비판의 맥락에서 읽는 것은 잘 알려진 독법이다. 가령 「고양이 죽이기」에서 “야생동물들을 잡아먹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호랑이나 사자의 이빨과 발톱이 아니라/잇몸처럼 부드러운 타이어라는 걸 알 리 없는 어린 고양이였다”라는 진술은 분명 야생과 문명의 대립처럼 보인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다음 싯구는? “씹지 않아도 혀에서 살살 녹는다는/어느 소문난 고깃집의 생갈비처럼 부드러운 육질의 느낌이/잠깐 타이어를 통해 내 몸으로 올라왔다./부드럽게 터진 죽음을 뚫고/그 느낌은 내 몸 구석구석을 핥으며/쫄깃쫄깃한 맛을 오랫동안 음미하고 있었다.” 타이어는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이되 ‘내 몸’의 연장이다. 얼핏 읽으면 ‘내 몸이 고양이의 육질을 음미하고 있었다’고 이해하게 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육질의 느낌이 내 몸을 음미하고 있었다’임을 알게 된다. 고양이와 ‘나’는 별개가 아니며 이 순간 ‘나’는 부지불식간에 폭력을 행사한 동시에 한번의 죽음을 겪는 이중의 자리를 떠맡는다. 카메라의 눈 같은 그의 시선은, 꿈속에서 행위하는 나를 내가 보듯이, ‘나’와 ‘고양이’ 어느 편에도 서지 않으면서 ‘육질의 느낌’이라는 또다른 주체를 전면화하고, 그리하여 ‘나(의 몸)’(주체)와 ‘타이어’(주체의 연장)와 ‘고양이’(대상)와 ‘육질의 느낌’(무기명의 실재 X)은 한덩어리가 된다.

주체와 대상이 불분명한 이 폭력적 사건의 순간, 뭉뚱그려진 하나의 덩어리를 무어라 해야 좋을까. 나는 그것을 ‘고통’이라고 불러본다. 고통은 ‘괴로움(苦)’이라는 심리적 사건과 ‘아픔(痛)’이라는 신체적 사건이 동시적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김기택의 시에서 종종 전경화되는 폭력의 현장이 불편한 것은, 고통이 우리가 알고 있는 무시무시한 아픔뿐 아니라 달콤함(고소함, 쫄깃쫄깃한 육질)을 동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이빨’과 ‘껌’, ‘나’와 ‘고양이’의 자리를 동시에 경험하는 일이다. 일찌감치 「쥐」에서 “아아 황홀하고 불안한 식욕”이라고 불리운 그것이 날마다 자행하는 달콤한 폭력, 생명 메커니즘 그 자체에 깃들어 있는 무차별적인 폭력성이 이 시집의 주인공은 아닐까?

김기택의 시가 정말로 환기하는 것은 이같은 폭력의 ‘질감’이다. 그는 「코뚜레」에서 “허나 도끼가 범할 일을 자세히 열거하고 싶진 않네”라고 쓰고선 천연덕스럽게도 “저렇게 일평생 순결을 감금당하고도/도끼에 겁탈당할 이마/겁탈당할 피 겁탈당할 죽음을,/겁탈당한 후에 다시 발가벗겨질 가죽과/그 속에 든 발갛고 촉촉하고 말랑말랑한 순결을”이라고 그 세목을 열거함으로써 언젠가 (아마도 반드시) 도래할 도살의, 입맛당기는 폭력의 현장을 전시한다. 이 시의 화자는 마치 ‘죽음’ 자체인 듯 여겨지는데, 이는 「고양이 죽이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육질의 느낌’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건강이 최고야」는 또 어떤가. 이 시의 주인공은 아동 강간살해범인데, 그의 이름은 ‘건강’이다. 그 추상적인 이름을 통해 이 시는 인격화된 인간 중심의 시선을 벗어나 화급한 욕망 자체의 사디즘적인 본성을 폭로한다. (‘건강’은 ‘강간’과 ‘ㅓ’를 제외한 모든 철자를 공유한다.) 특히, 이 시가 주는 충격은 그 소재보다는 화법의 변화에 크게 기대는 듯하다. 독자는 3인칭에서 1인칭, 또다시 2인칭으로 바뀐 화법을 따라가면서 객관적 서술의 청자이다가, ‘건강’ 자신이다가, 마침내 ‘건강’의 범행 대상의 자리에 놓인다. ‘건강’은 ‘건강함’이라는 자신의 위험한 특성 자체로 수사망을 빠져나가고, 고기(“핫크리스피 치킨”)로 고기(“영계”-아동-청자)를 유인하는 육식성 식욕의 먹이사슬을 적나라하게 노출한다. ‘건강’은 터지기 직전의 위험한 욕망(초과하는 식욕, 성욕)과 동의어가 된다. 이처럼,

김기택 시의 표면적인 주인공들은 진짜 주인공인 ‘생명-폭력’의 숙주들이다. 이 숙주의 “수염에서 슬픔과 두려움이 자라고 있는”(「옛날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것은 살아 있는 우리 모두가 지닌 생명의 본원적 폭력성이 우리 자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리라. 이 불편한 진실을 끝까지 들여다보게 하는 접안렌즈로부터, 당신은 눈을 돌릴 수 있을 것인가? 이토록 군침이 고이는데도?

(<창작과 비평> 2009,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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