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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review

처자를 거느린 디오게네스

화창
카테고리 시/에세이/기행
지은이 김영승 (세계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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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보다 더 찬란한 극빈"으로부터 7년 만이다. 7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독자인 우리로서는 시집을 통해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시 쓰는 것 말고는 별달리 하는 일이 없는 대한민국에 몇 안 되는 전업 시인 김영승은 지난 시집에서 “나만이 나의 노예”(「G7」)라는 ‘정신의 위대’와 “하긴/전당포에 외투를 맡긴/마르크스의 아내가 무슨 놈의 품위”(「가엾은 아내」)라던 ‘극빈의 위력’ 사이를 “매달려/늙어가는 호박은, 끌려가지는 않는다”(「매달려, 늙어간다」)는 긴장과 자긍심으로 생존해냈다. ‘생존해냈다’. 슬로터다이크의 말처럼 “사회적 삶은 안전한 은신처가 아니라 온갖 위험의 원천이다. 그렇게 되면 태연자약은 생존의 비밀이 된다.” 그러나 이 태연자약은 독자를 부끄럽게 한다. 그의 생존은 2300여 년 전에 디오게네스가 90세 넘게 살았다는 소문보다 더 기적적으로 여겨지기 직전이다. 적어도 디오게네스의 시대에는 왕이 그에게서 지혜를 보았고, 시민들은 그를 존경할 줄 알았으니까. 그리하여, 독자는 그의 희귀한 생존을 디오게네스가 예고하던 희랍 세계의 황혼보다 더 짙은 풍요한 일몰의 광휘 속에서, 본다. 볼 수 있다는 것만도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