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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 context

시와 세계, 2016, 봄.

사람 그리는 노래


송승언



정원으로 이어지는 여러 갈래의 길에는

신도들이 늘어서 있고 신앙심을 시험하려는 듯이

줄줄이 대기열을 만들고 혀를 내밀고 있다

혀끝에서 신속히 흩어지는 것

없었던 듯 새겨지는 것

그것을 위해 나는 항상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낯가죽을 새롭게 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혀를 내밀며 드는 생각은 이것

나는 대체 어떤 종류의 인간인가?


여러 갈래의 길로 이어지는 정원에 서서

향나무의 뒤틀림에 경탄했다

저렇게 뒤틀릴 수만 있다면 

개발 중인 신도 두렵지 않을 텐데

비늘조각이 육질화 된 향나무를 보며

향나무 좋지...나도 좋아해

말씀하시던 신부님은 맥주 마시러 갔고


나는 이제 내 팔다리의 멀쩡함을 입증하기 위해

뇌에 대 타격을 입은 사람의 말을 빌려 쓴다

탁구 하던 사람

술집 하다가 망한 그 사람


종이 울리면 슬프지는 않았다

신앙을 잃은 사내아이의 몸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마지막으로 만지고

또 냄새 맡았던 전도서의 겉표지 냄새

(62-63.)




봄밤


박상순



어두운 골목길에 떨어져

끝까지 움직이는


한쪽 팔

(87. 기발표작.)




"...'엉뚱한 듯한 발상'은 우연의 법칙을 그대로 바론(오타?) 따른 결과가 아닙니다. 거듭된 실험을 통해 글쓰기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발탁된 것들이 마치 우연의 법칙에 따라 늘어선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결국 오랫동안 갈망한 결과로서의 우연이 미학적 작용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기를 소망합니다. 당위성 보다는 필연적으로 우연적이기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관 또는 그것과 유사한 개인의 세계관이 강하게 작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상순, 한상규 대담, "낯선 놀이공원으로의 초대", 100-101. 밑줄은 내가.)




승언이 시는 서늘하고 좋구나. 점점 더 좋구나. 


남이 준 신앙을, 아직 거절할 '자기'가 없어서 헐수없이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그것을 반드시 한번은 완전히 잃어버려야 하는 거겠지. 자기 자신과의 결별. 그것은 마치, 자기가 태어난 땅을 떠나는 것과 같아서,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주어졌던 자기의 환경--주변의 공기, 분위기, 사고와 감정을 결정하는 문화로서의 풍경--과 결별하는 것. 


열서너 살에 나는 이미 (실제로는 가져본 적도 없는, 떠맡겨진 것에 가까운) 신앙을 잃었지만, 고등학교에 다니는 내내 가방에 성서를 넣어가지고 다니며 아침마다 빈 문예반실에서 성서를 읽었는데(10년쯤 전에 수영이가 이 이야기를 해주기 전까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건 일종의 애도였던 듯. 뭐랄까, 할아버지의 유골 단지를 방안에 모셔놓고 있는 것 같은 그런 것이었을까? 그 기나긴 애도는 경전을 문학작품으로 바꾸어주었는지도. 하지만 스물세 살, 밴쿠버에서 어학연수 중이었을 때, 일요일 아침마다 들려오던 동네 교회 종소리에 두근거리며 식은땀을 흘렸던 기억종소리가 들릴 때마다 뛰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싶은 마음을 이를 악물고 참으면서.


파스칼은 신앙이 있어서 기도하는 게 아니라 무릎을 꿇으면 신앙이 생길 거라고 했지만, 분명 '모태 신앙'이라는 우스운 이름의 굴레를 진 사람들의 곤혹은 종소리가 들리면 무릎을 꿇고 싶어진다는 것. 그럴 때 자신이 파블로프의 개처럼 침을 흘리고 있지는 않은지 매주 의심하게 된다는 것.


돌아가든, 돌아가지 않든, 그는 한번은 반드시 떠나야 할 테지.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신념 체계, 뿐 아니라, 그보다 훨씬 슬프게도, 자기를 구성하고 있는 낱낱의 세포에 서린 용연향과 오르간 소리를. 


희한하게도 이 글은 마치 성서정과 같군... 하긴, 사사키 아타루는 중세 해석자 혁명이 텍스트를 읽고 생각하고 고쳐 쓰는 가장 길고도 급진적인 혁명이었다고 쓰고 있기도 하니까. 현대 해석학의 기원이 성서 해석학이라는 그런 단순한 이론적 사실을 떠나서도 해석 행위 그 자체의 진지함은 어느 텍스트에 대해서거나 경중을 따질 수 없을 테지만...없을까? 원리주의 기독교인들이라면 문학이 종교를 대체한다고 했던 매슈 아놀드의 말이나, 이미 대체했다고 쓰고 있는 테리 이글턴 같은 개량주의 종자들을 (만일 이해하기라도 한다면) 당장 저주하고 말 텐데; "뭐? 복음서가 세계문학전집 리스트와 동급이라고?" 아니지...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원리주의자가 아니라 자기 밖으로 한번도 걸어나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일 테지. 한번도 진지하게 책을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 자기 무의식이 들려주는 것을 신의 말씀으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 신의 대리인이라는 전능감에 취해 그 힘을 대신 좀 써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나저나 문학도 죽었다고들 하니 이제 뭘로 대체하면 좋으려나? 대체할 게 아무것도 없으면 아주 아주 유감스러울 것 같은데.) 


(이렇게 건방지게 쓰고 있는 동안에도 내가 신성성-'내가 모르고 있는 게 세상에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섬광과도 같은 충격적인 느낌을 반복하게 만드는-을 믿고 있다는 가공할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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