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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 context

들뢰즈

7월 18일의 일기. 

들뢰즈의 유작인 비평과 진단을 읽고 있다. 본래는 들뢰즈와 문학에 관한 글의 집필을 시작해야만 했지만.

이 책의 번역에 비문이나 오탈자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 것은 사실이지만, 매저키즘 같은 예외를 제외하고는 들뢰즈의 책 거의 전부가 이렇게 독해에 저항한다. (매저키즘이 영어 중역이라서일까? 그러니까, 그의 불어 텍스트 자체가 번역하기 어려운 것일까?) 이 책의 앞머리에 붙은 췌사는 심지어, 프루스트의 反 생트-뵈브(Contre Sainte-Beuve)라는 책에서 인용한 다음의 문구이다; "훌륭한 책들은 일종의 외국어로 씌어져 있다." 자신의 책이 잘 읽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지한 상태에서 붙여놓는 이런 췌사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의 책이 읽히지 않는다고 당신은 불평하겠지만, 그것은 나의 책이 훌륭하기 때문이고, 따라서 당신은 훌륭한 책을 읽어낼 자격이나 능력이 충분치 않음을 의미해.'라는 식의, 이를테면 선전포고인데, 그렇다면, 들뢰즈는 자신의 불가해한 글쓰기가 의도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어쨌든 그다지 잘 읽히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 신경을 쓰고 있었던 만큼은 분명하다. 이런 식의 오만은, 아도르노가 자신의 글을 쇤베르크의 음악에 비교하면서 (이를테면 개, 돼지 같은) 우매한 대중들을 걸러내기 위해 일부러 어렵게 썼다고 할 때와 같이 밥맛을 떨어뜨리는 요소가 있다. 들뢰즈의 이와 같은 자기 과시, 혹은 나르시시즘이, 아도르노와 달리 생성적인 무엇에 집중되어 있음을 암시할 때, 그 생성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자신의 영원한 잘남"을 위한 것인가? 이 엘리트주의. (그런데 모든 엘리트주의는 정말 비판 받아 마땅한 것일까? 스턴의, "민주주의에 대한 경멸"을 우리 모두 조금씩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니체가 그 모범을 보여준 가없는 나르시시즘이 결국 역사적인 파시즘과 결합되었을 때, 그건 뭘 의미하는 것일까? 결국 어떤 국면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우연히 대체로 저열할 때, 그들은 저열한 목적에 가장 큰 힘을 보태어준다는 것, 그것이 아닐까? 우리가 지난 2012년 총선-대선 이후 이웃에 대한 신뢰를 잃은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던가?) 아무튼, 들뢰즈는, 머리말에, "문학은 일종의 건강이다"(14)라고 써놓았는데, 이것은 과장이다. 자기 글쓰기의 실험적인 측면들이 이끌어가는 비정상성, 혹은 상궤를 벗어남("Time is out of joint"; 이 말은 "햄릿"의 그 유명한 대사로서, 들뢰즈는 이 책의 5장, "칸트 철학을 요약해줄 수 있을 네 개의 시적 표현에 관하여"에서 중심적으로 인용, 원용하고 있고, 지젝도 이 어구를 즐겨 사용한다. 내 기억에는 라캉이 집단 신경증의 가능성을 시사할 때에도 어느 인터뷰에선가 같은 인용문을 사용했던 것 같다.)을, 마치 위대한 사유 실험 일반에 속하는 것처럼 만들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슬로터다이크가 신의 반지에서 예언자를 "봉인된 편지"라고 불렀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그리고 종종 예언적이며 위대한 사상이나 언명들이 불가해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불가해한 모든 것이 예언적이며 위대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들뢰즈의 글쓰기는, 무엇보다도, 불가해성보다, 그 지루함이 문제인 것이다. 

비평과 진단 - 문학 삶 그리고 철학
국내도서
저자 : 질 들뢰즈(Gilles Deleuze) / 김현수역
출판 : 인간사랑 2000.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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