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왕국에서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그러니까, 1991년 늦가을, 아직 종로에 종로서적이 있었을 때였다. 나는 막 고교 2학년 진학을 앞두고 본격적인 문청 행세를 시작하고 있었고, 그에 걸맞은 허세를 완성해줄 책 한 권을 사게 되었다. 한 영문학자가 엮은 『포스트모더니즘과 한국문학: 후기산업사회의 문학적 대응』이라는 이 한 권의 책은, 정말이지 알 듯 모를 듯한 소리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등하교 시간의 버스 속에서 여드름투성이 안경잡이 고등학생의 자긍심을 키워주기에는 그만인 제목을 달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저 옛날 고교 비평준화 시절,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1급 문예지였다는 지라든지, 선배들이 교류했던 내로라하는 공립 고등학교 문예반들에서 오랜 세월 보내온 교지들, 70-80년대 문학잡지와 시, 소설 등으로 가득 차 있었던 문예반실 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