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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 context

누구나 알고 지내는 파르티잔 하나쯤은 있는 거 아니에요?

고등학교 동창들을 서울에서 만나면

                                                              서효인


아마도 집이나 직장에서는 그러하지 않겠지만

우리는 강남 한복판에서 고래고래 사투리를 썼지

조금은 불편해지려고 했다 너희가 사투리로

자의식을 확인하는 자들이여 절대로 잊지 못하는

사투리여 왕따의 기억처럼 죽이고 죽여도

되살아나는 빌어먹을 사투리여

염병할 뉘앙스여 괘씸한 톤이여 공동체여

너나없이 쓸데없이 맥락 없이 욕을 뱉고 술잔은

이리저리 세상 바쁘고 이것이 몇 년 만일까

아마도 집이나 직장에서는 그러했겠지 예전에

착한 학생이었고 놀 때는 놀았고 의리도 있었지만

지금은 강남대로에서 택시 하나 못 잡는다

이왕 모였으니 좋은 데를 갈까 하는 녀석은 여기 또 있고

미안하지만 부끄럽다 죄송하지만 기억이 안 나요 반말이

어색하요 하지만 사투리는 편하지 감각에 우정을 맡기고

기억을 추렴해 보지만 사투리만 기억난다

너네 얼굴은 이름은 번호는 성적은

몇 년 만이냐 이러한 폭력은 

없었다 다들 성공해서 서울이나 서울

가까운 곳에서 배우자와 자식과 먹고살고

있구나 명함을 나누자 인맥이 생기며 근거가 생기고

공동체도 생기고 자의식도 생기고 사투리가 없어진다

병원에 있는 친구여 연락을 하겠다

법원에 있는 친구여 연락을 하겠다

전화기를 붙잡고 사투리로 내가 그때

부끄러웠다

용서해 달라

하는 친구는 없었고

숨 가쁜 우정의 무대 위로 꺼냈던 반지갑들이

바짝 접히고 있었다

-격월간 <시사사> 86, 2017, 1-2(135-6).


매일 처음 반성하는 것처럼 반성하는 벗이여, 10년 전에 너는 소년 파르티잔이었지. 한국 사회에서 김광규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썼던 나이 즈음이 되면, 그 어떤 전직 파르티잔도 사회생활과 가정생활 사이에 끼인 페이소스를 단번에 집어던질 초강력울트라파워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겠지. 그러나 멋진 돌팔매나 신출귀몰할 스태미너 대신 너는, 미사여구를 쫙 뺀 묵직한 뚝심이 비로소 자연스러운 자기의 얼굴이 되어 있는 것을, 그리고 그 얼굴에 제것이 아닌 다른 표정을 입힐 필요가 없는 것을 알게 되었나 보다. 다행이다. 너는 오래전부터 자기 객관화가 장기였어서 반성의 제스처를 골몰하는 새삼스러운 연습 같은 것은 필요가 없을 테니까. 그것은 너의 습관이고 특기이고 운명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