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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常

휴강의 18세기적인 변명


그래, 난 오늘 휴강한다.
며칠, 휴식이 필요했다.
몸은 해면처럼 가라앉고 하느님은 해파리처럼 내 멍한 정신의 수면 가장자리를 배회하고 계신다.

3주째를 지나고 있는 희망의 인문학 강좌에서 80명의 자활센터 회원들과 그랑빌을, 김애란을, 함성호와 고영을 읽으면서 대학생들과는 이야기하지 않았던 문학의 본질과 기능을 완전히 일상적인 언어로 함께 사유하면서 어떤 가능성들을 발견하고 있다.
성급하게 일반화하지 않겠다. 그들의 핵심 요약과 작품에 대한 견해는 온전히 경험적인 삶으로부터 도출되었으되, 훌륭한 관념론과 훌륭한 경험론이 그렇듯, 중요한 논점들을 놓치지 않았다. 물론 세련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책상머리에서 곰팡이 핀 엉덩이로부터 흘러나온 냄새나는 개념들을 완전히 폄하하지 않고서도 우리는 학문이 충분히 생활과, 그리하여 우리 개개인의 윤리와 밀접해 있다는 것을 함께 알아가고 있다. 이 시간은 너무나 짧지만, 어느 날 우리 중 누군가는 잠자리에 누운 시각, 어둠 속에서 이 벼락 같은 시간들이 생의 긍정적인 균열로 나타나는 것을 볼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은 휴강한다. 학생들은 비싼 등록금과, 밤샘 알바와, 과제물과, 미래를 결정짓는 학점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고, 나는 나의 수업이 이 피곤한 순환의 일부로서만이 아니라 그것의 바깥에 대한 상상과 연결되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인데, 나는 마감이 이미 지난 나의 짧은 원고와, 값싼 강사료와, 근무시간과 휴식시간-그리하여 나의 사생활과 공생활이 불분명한 혼돈에 시달리고 있고, 그러나 이것은 거의 엄살에 가깝고, 그럴지라도 이 피로는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엄살을 부리면서, 휴강한다.  

고민을 멈추지 말아라.
라고 나의 정신의 한 부분은 말하고,
제발 여유를 가져라.
라고 나의 몸은 말한다.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
라는 말이 노래가 되도록 했던 김수영의 피로한 시와 일생을 생각하면서 나에게는 자책감도 들지만,
규율로 하여금 나 대신 삶을 살게 하는 바바리안이 되지는, 절대로, 않겠다.
그리하여 나는 상상의 동지들에게 고한다.
놀이와 일과 사랑이 통째로 삶의 총체적인 탐구가 될 것이라고.
그대가 이것을 부인한다면 쉴러를 빌려서, 그대는 the savage가 되든가 the barbarian이 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