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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 context

'당신'과 '그들' 사이에서

비명을 찾아서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복거일 (문학과지성사, 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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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만에, 아이들에게 과제로 내주면서 다시 읽었던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는, 그동안 나뿐 아니라 사회적 서정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새삼 다시 생각하게 했다.

SF 소설의 형식을 빌려 보여주는, 민족적 울분에 휩싸인 40대 직장인 남성과 그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가 지극히 현실적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지만, 이에 대한 주인공 히데요의 관점과 반응이 극도로 상투적이고 전혀 신선하지 않은 것이, 복거일이 세계시민주의라는 '내용'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토록 상투적인 민족 감정의 왜곡된 형태로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 따위의 책을 펴낸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놀랍(지 않)게도, 20대 초반의 학생들은 이것을 과거와의 비교를 통해서가 아니라 피부로 느끼고 생래적 거부감을 느낀 듯하다. 대개 비판적인 보고서들은 이러한 논점들을 주제로 삼고 있었다. 그러니까, 복거일의 잘못은 '수구꼴통'의 견해를 주장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이미 낡아 있다'는 데에 있다. 그의 우파적 (혹은 낡은 이념에 입각한) 세계시민주의는 일면, 그 근원적 의미에서의 정치철학적 '자유주의 사상'에 기반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칸트의 세계시민주의와 노직의 자유주의 사상은, 이것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신선하며 (새로운 것을 상상하도록 영감을 고취한다는 의미에서) 이상주의적 기획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것이 신선하게 여겨졌을 이유라면, 아마 그 형식 때문일 터인데, 작가는 자기가 상상해 낸 그 체제에 너무나 영합적이어서 그 보수성이 형식보다 오히려 더 나를 놀라게 한다. 그의 작금의 입장이, 히데요의 '사상 개조'를 담당한 그 조선인 출신 사상보국연맹 회원인 하쿠야마를 판박이처럼 닮아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히데요의 '조건들'은 히데요의 '행위들'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어서, 아무리 그의 임시정부行을 긍정적으로 읽는다 해도 그것이 계란으로 바위 치는 무용한 비극적 희극으로 보인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90년대 초에 이 책을 읽었을 때에는 이 정도로 체제 영합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게 전적으로 복거일이라는 작가 개인의 '우회전'(혹은, 우파 입장에서는 사회 전반의 '좌회전')과 완전히 무관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를 둘러싼 정황의 전체적인 변화가 더 큰 요인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후에 더 세련된 독법을 익혀 왔다는 점도 거기에 포함된다.

그렇게, 텍스트는 역사적 검증의 시간들을 통과하는 건가. 그런데 그 '역사'라는 것은, 유행의 집적이고? 아무리 유행과 무관하게 사는 사람이라도 90년대식 화장과 옷차림을 보고 촌스럽다고 느끼지 않기는 힘들다. 80년대만 해도 이제 역사적 의미화의 과정을 지나고 있기 때문에 촌스럽다기보다는 의고적으로 느껴진다. 세계-내-존재의 그 '세계'는 끊임없이 부글거리면서도 언제나 어딘가를 향하고 있어서, 융의 '집단 무의식'이든, 헤겔의 '시대정신'이든, 푸코의 '에피스테메'든, 그 벡터의 자장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엄청난 고집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악한 사람들은 '반시대적'이기보다는 '시대를 앞서나가려' 충혈된 눈으로 미래를 기획한다. 남들이 미처 개척하지 않은 영역을 선점하고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되고, 담배를 끊고, 깨알 같은 글씨로 가득 찬 스케줄러를 필요로 하고, 영어 공부에 전념하고, 월드스타가 되기 위해 한발 앞서 나가는 아이돌을 '무릎팍도사' 같은 오락 프로에서 보면서 신자유주의 처세술의 전면적인 승리를 확정하는 데 일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 동시대 사람들은 모두 영악해지기를 요구받고 고무된다. 

하지만, 당신도 알고 있겠지? 당신은 최고가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그들'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그래서 노력할수록 점점 더 초조해지고 점점 더 당신이 누군지 알 수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주장함으로써 민주적인 동시에 서로의 노예인 5천만 마리의 일개미들 중에서 조금 더 평범한 일개미가 되어간다는 사실을?

본의 아니게 이 포스트는 복거일을 일개미들의 수장으로 만들고 말았지만,

나는 그저, 결심보다 명상과 반성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 자신에게 명백히 하려고 했다는 생각이 든다. 세계를 바꾸는 일이 도대체 요원해 보일 때에는 해석이라도 해야 한다. 최초의 의구심을 편안한 논리로 정당화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자. 그것이 가장 쉬운 일은 아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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