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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 context

계간 <문학선> 2016년 여름호

기억해둘 만한 글

* 서용순, 사건의 윤곽과 문학의 연루에 대하여



까마귀 연합

 

김혜순

 

한국까마귀와 일본까마귀 중국까마귀

세 마리가 8.15에 신칸센을 타고 가면서 도시락을 먹고 있는데

 

까마귀 두 마리의 조그맣고 빨간 고무 인형 손처럼

한국 까마귀의 손도 빨갛게 작은데

 

추하게 생긴 눈썹이 탱크 같은 트렁크를 몰고 옵니다

 

갉작갉작 시계는 내 가슴에서 흐르고

갉작갉작 전분은 내 대뇌에서 흐르고

 

까마귀 세 마리가 서로 서로를 엄마아빠로 착각하고 있는데

피 범벅된 아기 까마귀를 감자로 착각하고 있는데

 

돌림노래를 부르러 가고 있는데

 

뇌 깊은 곳 환희 바이러스가 폭발하고 있는데

까마귀의 이빨들이 은빛 펜촉으로 변하고 있는데

 

당당한 까마귀들의 영혼이

일본의 하늘에 쇠붙이 같은 글씨를 쓰고 있는데

환시 환청 환취 환미 환각

이렇게 의자 밑에서 차례 차례 파도가 밀려오는데

환희의 곤충들이 머리에 쏟아지는데

 

식당에서 코를 팽 풀면 미국

식당에서 코를 훌쩍 들이마시면 한국이라고

한국까마귀가 흥분에 취해 떠들고 있습니다

 

우리들 머리 위에는 아직도 식민지 시대처럼 검표하겠습니다? 검표!

제가 먼저 묻고 제가 먼저 대답하는 검표원 까마귀의 검은 구두

 

화장실 세면대 아래엔 맨홀 뚜껑을 열고 올라오는

고깔모자 트롬본 악사들의 기미가요 연주

 

열차가 속도를 줄이자 빌딩들이 깃발처럼 나부끼고

나는 한국을 싫어하지 않습니다만 다른 사람들은 모르죠

거짓말하는 자동차들이 빨주노초파남보

열차 위로 또는 열차 아래 몰려드는데

한국까마귀는 이 섬에서 나가라고 깃발 든 일본까마귀들이 거리를 가득 채웁니다

 

식민지 수도 경성역에서 고한용이란 시인이

일본 시인 쓰지 준이 도착하는 플랫폼에

다다이즘이라 쓴 깃발을 들고 그를 환영하고 있었어

너희들이 서울에 도착하면 나는 무슨 깃발을 들까?

 

전기충격기를 장착한 탱크 같은 트렁크가

한국으로 돌아가서 명령의 맛을 더 볼래?

세 마리 까마귀를 추격하고 있습니다

 

 

공중의 꽃

 

명미

 

주저앉았다가 깊은 생각에 잠긴다 서성거림을 단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었다 끊임없이 외로움의 언저리를 맴돌았다 한치의 틈 없이 닫힌 문처럼 완벽한 합일의 순간이 있을까

 

끈끈이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파리들

 

씨방 속에 깊게 내린 꽃술,

 

허우적거리게 하고

두 발을 묶고

날개마저 접게한

황홀함이여

 

신열에 들뜬 꽃이여

 

지난봄......군법회의에서 충돌한 이래 두 사람의 사이는 극도로 나빠졌다. 대립과 마찰이 그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계속됐다. 시광은 학천의 오카리나를 귀신우는 소리, 계집아이 취미, 소극적, 감상적, 이런 말로 배격했다. 학천은 시광의 수풍금을 칠그릇 깨지는 소리, 마차가 자갈밭을 가는 소리, 미친놈 취미, 저돌적, 이런 문구로 비난했다.

시광이 오리 알을 맛있다고 하면 학천은

그것도 입이냐? 저급취미.” 이렇게 타기(唾棄)했고 학천이 짜장면이 맛있다고 하면

그것도 입이냐? 이단경향.”

하고 시광이 반격했다.

변증유물론적 세계관만을 제외하면 기타의 모든 것은 모조리 정반대의 대립상태였다. 대장들의 사이가 그러니까 부하들도 자연히 그것을 본받아서 매사에 대립형세를 이루었다.

X대와 X대는 부득이한 공사(公事)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절교상태가 되어버렸다. 딴 지대에서는 이 지대를 불러서 대립물의 통일지대라고 했다.”

-김학철, 균열중에서. (19464신문학창간호에 발표.)

균열은 이번 호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김학철을 조명하면서 다시 읽는 소설로 선정된 두 편 중의 하나다. 앞에 실린 이원규가 쓴 작가론, 김학철, 디아스포라의 인생과 문학은 김학철의 곡절 많은 인생을 찬찬히 정리하고 있다.

 

* 윤길수, 특별한 책들과의 만남 2

: 이 글은 일제 강점기에 총독부 임업시험장의 말단 공무원으로 일하며 한국 소반과 도자기에 매료되어 조선의 소반(1929)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1931)를 쓴 아사카와 다쿠미(浅川巧), 그리고 35년간 조선 도자사를 연구하며 부산요와 대주요(1930)를 쓴 그의 형 아사카와 노리다카(浅川伯教)의 책들, 그리고 문일(文一)조선영화전집(1931), 무성영화시대의 영화소설들과 조선 최초의 영화 전문 서적인 박누월의 영화배우술(1939) 등의 영화 관련 서적을 소개하고 있다. 글쓴이는 고서 수집가로, 전문적인 글쟁이는 아니다. 그래서인지 여러 군데 오탈자가 있고 인용 부호를 건너뛰는 등 문법적인 측면에서 실수가 많지만, 몹시 소탈하고 정보 전달에 충실하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박누월(朴嶁越)이라는 사람의 생애다.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지만 생몰연대는 물론이고 어느 인명사전에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그는 시인, 소설가, 번역가, 배우, 유행가 작사가, 영화제작자, 출판인으로 활동했다. 그 중에서도 뚜렷한 업적 세 가지를 든다면, 첫째 일제강점기에 가장 많은 영화소설을 쓴 것, 둘째 1931년 창간한 영화시대잡지를 휴간과 속간을 거듭하며 1949년까지 이어나간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한국 최초의 영화전문서적인 영화배우술(1939)을 펴낸 것이다. 그는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간간이 대중소설과 서간집으로 얼굴을 보이다 아주 종적을 감췄다. 그러다 어느 날, 일간 신문은 1965310일 아침 8, 길거리에 쓰러져 죽은 한 남자를 이렇게 보도하고 있었다. ‘영양실조로 숨진 왕년의 영화감독(오보, 제작자) 길거리에 버려진 채 朴裕秉옹 어제 별세.’ 경찰이 신원을 파악하는 동안 시신은 인파로 붐비는 종로 5가 한길 모퉁이에 거적에 싸여 팽개쳐져 있었다. 그의 신원은 박유병, 서울 출생, 62, 사인은 영양실조였다. 그는 박누월(淚月, 嶁越, 樓越)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249)

 

* 이경철, 박노해 신드롬’: 순정한 이념과 삶속에 육화된 시심(詩心)의 신화

: 이 글을 쓴 이는 오랫동안 중앙일보에서 문화부 생활을 거친 기자 출신. 고등학교 때 문예반실에서 처음 박노해 시집을 읽은 이후 시인 박노해의 삶과 그가 일으킨 파장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글을 아주 오랜만에 읽는다. 10대 시절에 그의 시를 읽고 충격도 받았고 좋아하기도 했지만, 대학에 가고서도 그것을 드러낸다는 것은 어딘지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만큼 노동계급이라는 단어의 어떤 준엄함의 분위기, 당사자주의 같은 것의 잔영이 남아 있었던 탓이겠다. 강의실에서 영미철학특강이나 철학적 인간학 따위를 듣고 있는 학삐리가 위장취업한 선배들의 전설을 들으면서 박노해 시를 읊는 것은 양심에 찔리는 짓이었다. 이미 변절자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 것도 어쩐지 마음에 걸렸었다. 그런 마음의 짐들을 좀 벗고 저널리스트의 에세이로 박노해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사상범으로 옥고를 치르고 죽을 위기를 넘긴 사람들은 왜 종종 전지구적이거나 우주적이 되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생각난다. 대학 2학년 때인가 과사무실 한쪽 귀퉁이에서 시 세미나를 하고 있을 때 처음 보는 동자승 분위기의 남자가 한메타자 연습을 열심히 하고 있기에 누구냐고 물어봤더니, 옆에 있던 대학원생 선배가 이야기해주기를, 사상범으로 투옥되는 바람에 제적 처리 되었다가 복적한 선배라고 했다. 그는 웃음이 많고 세상 누구에 대해서도 악담을 하지 않았으며 시를 사랑했다. 훗날 전해 들으니 이후에도 그는 졸업을 하지 않고 일본에 건너가 요리사가 되었으며 한국에 돌아와 식당을 차렸다는 것이었다. 그가 무기징역이나 사형 선고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요리사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어떤 이들은 강성이었던 이들은 늘 강성으로 남아 있기를 바라기도 하겠지만, 그리고 사상범으로 감옥에 다녀오는 사람들이 사상 이상의 철학으로 전향하는 것이 변절이라고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어쩌면 당사자들도 그것이 변절인지 아닌지 수없이 생각하지 않았을까?), 좁은 곳에서는 더 큰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게 너무 커져버리면 김지하 선생처럼 우주의 운행 같은, 지상에서 발을 거둬들인 이야기들을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생활과 유리된다는 점에서 투옥 생활은 일종의 수도 생활과 비슷할 수도. 홍대 앞에서 장사한다는 그 선배를 수소문해서 찾아가 라멘이라도 하나 사먹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지만, 대학 생활에 대한 애증 때문에 번번이 포기.

 

<문학선>, 매번 느끼는 건데, 화려한 필자 없이도 진짜 잡지를 만드는 법을 안다. , 이건 내 관심사가 아닌걸, 하면서 첫 문장을 읽고 나면 글의 나머지를 다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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