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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 context

격월간 시사사, 통권 84, 2016년 9-10월호

내 인생의 책


                                이장욱


그것은 내 인생이 적혀 있는 책이었다. 어디서 구입했는지

누가 선물했는지

꿈속의 우체통에서 꺼냈는지


나는 내일의 내가 이미 씌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따라

살아갔다.

일을 했다.

드디어 외로워져서


밤마다 색인을 했다. 모든 명사들을 동사들을 부사들을 차례로 건너가서

늙어버린 당신을 만나고

오래되고 난해한 문장에 대해 긴 이야기를


우리가 이것들을 해독하지 못하는 이유는 영영

눈이 내리고 있기 때문

너무 많은 글자가 허공에 겹쳐 있기 때문


당신이 뜻하는 바가 무한히 늘어나는 것을 지옥이라고 불렀다. 수만 명이 겹쳐 써서 새까만 표지 같은 것을 당신이라고

당신의 표정

당신의 농담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이상한 꿈을 지나서


페이지를 열 때마다 닫히는 것이 있었다. 어떤 문장에서도 꺼내어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당신은 토씨 하나 덧붙일 수 없도록 완성되었지만

눈 내리는 밤이란 목차가 없고

제목이 없고

결론은 사라진


나는 혼자 서가에 꽂혀 있었다. 누가 골목에 내놓았는지

꿈속의 우체통에 버렸는지

눈송이 하나가 내리다가 멈춘

한 문장에서

- 이장욱,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문학과지성사, 2016.





가정


                        조혜은


나는 몸통을 잃는다. 


너의 사랑은 기형적이었고 일그러진 형태로 바닥에 짓뭉개져 있었다. 너는 너를 사랑하기 위해서 내 발목을 잡거나 칼끝으로 내 코를 잘라내거나 망치로 내 손가락을 때려 하나씩 뜯어냈다. 하루는 자고 있는 나의 자궁에 구덩이를 파서 주먹을 집어넣고는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었다. 너는 너를 사랑하기 위해서 나를 괴롭히는 이유를 댔다. 너는 어디에서 왔을까? 너는 누구일까? 가끔 나는 의아했다. 어째서 너는 나를 괴롭히는 것을 정당하게 인정받게 된 걸까. 나는 어디서 살고 있는 걸까. 너는 네가 하는 말의 즐거움을 위해 나를 모독하고 몰아세워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너의 부모는 자기 자식의 즐거운 놀잇감을 보내주지 않으려고 내 자식들의 목덜미를 잡았다. 너의 가족은 누구일까. 나는 너라는 말이 끔찍했다. 너는 우리의 아이가 든 나의 배를 주먹으로 힘껏 누르며 즐거운 듯 재잘거렸다. 아이의 팔다리가 무의미하게 짓이겨져 일정한 무늬로 흘러내렸다. 그런 너에게 결혼이란 참 합리적인 제도였다. 그곳에서 너는 어떤 처벌도 사랑이란 말로 무마하며 결코 나와는 행복하지 않았다. 

- 조혜은, 『신부 수첩』, 문예중앙, 2016.





내 영혼의 북가시나무


                                        최승호


하늘에서 새 한 마리 깃들지 않는

내 영혼의 북가시나무를

무슨 무슨 주의主義의 엿장수들이 가위질한 지도 모래되었다

이제 내 영혼의 북가시나무엔

가지도 없고 잎도 없다

있는 것은 흠집투성이 몸통뿐.


허공은 나의 나라, 거기서는 더 해 입을 것도 의무도 없으니

죽었다 생각하고 사라진 신목神木의 향기 맡으며 밤을 보내고


깨어나면 다시 국도변에 서 있는 내 영혼의 북가시나무,

귀 있는 바람은 들었으리라

원치 않는 깃발과 플래카드들이

내 앙상한 몸통에 매달려 나부끼는 소리,

그 뒤에 내 영혼이 소리 죽여 울고 있는 소리를.


봄기운에

대장간의 낫이 시퍼런 생기를 띠고

톱니들이 갈수록 뾰족하게 빛이 나니

살벌한 몸통으로 서서 반역하는 내 영혼의 북가시나무여

잎사귀 달린 시詩를, 과일을 나눠주는 시를

언젠가 나는 쓸 수도 있으리라 초록과 금빛의 향기를 뿌리는 시를

하늘에서 새 한 마리 깃들어

지저귀지 않아도

- 최승호, 『고슴도치의 마을』, 문학과지성사,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