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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常

패륜적인 충고

1월 2일의 일기.

이게 다 정치 때문이다. 오래 살다 치매에 걸린 전두환과 일찍 죽은 노무현 때문에 밥상머리에서 아버지와 언성을 높이며 싸웠다. '싸웠다'는 말이 마음에 든다. '아버지가 나에게 화를 내셨다'거나 '아버지의 설교를 들었다'거나 '아버지의 꾸중을 들었다'보다 백 배 마음에 든다. '아버지와 이야기했다'보다도 마음에 들려 한다. 

아빠는 살아 생전 집권시절에 노무현이 '양극화'에 대해 너무 자주 언급한 것이, 그리고 종국에는 자기 자신 자살해버린 것이, 자기가 중산층이라 믿었던 서민들을 불행에 빠뜨리고 자살충동을 동반한 우울증 상태로 몰아갔다고 주장했다. 아빠에게 나는 빠른 말과 논리로 대항했지만, 이전 시대 '좌파'의 뿌리 깊은 컴플렉스에 대해서는 지금, 다시 생각해보고 있다. 카진스키가 줄곧 '좌파 일반'을 비판했던 <선언> 생각도 불현듯 다시 밀려 온다.

분노와 적대감에 관해 다시 생각한다. 가치판단을 유보하고. 사람들이 <나꼼수>에 열광하는 이유는 집요하고도 명랑한 비판 태도 때문이다. 이게 비장해지거나 엄숙해지기 시작하면 파시즘으로 즉각 흘러갈 것이다. 김어준의 탁월함은 그의 자유주의적 천성이 그로 하여금 그런 엄숙함과 비장함이 '우스꽝스럽다'고 느끼도록 하고 있다는 것. 진지함과 권위주의적인 도덕적 엄숙주의를 구별할 줄 아는 능력은 얼마나 소중한가. 대중추수주의와 아무런 관계없이, 나는 그가 이 시대에 보석과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생명력 넘치는 천성이 있다. 같은 시대를 사는 것은 축복이다. 그 어떤 정치인이나 유명 작가보다도. 그는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살고 있었던 자유주의자의 전형이다. 이 말이 아무리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지라도. 그런 입장에서는 험버트 험버트도 <공산당 선언>이나 <제 3의 길>에 대해 비평할 자유가 있다. 아니, 그보다도 이렇게 말해야겠지. '시정잡배'도 진보를 자칭할 권리가 있다. 개도 주교를 쳐다볼 권리가 있다.

하여간 아버지와 계속 싸우고 조직할 일이다. 같은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과 같은 정치적 의견을 말하며 위안을 얻는 것도 중요할 테지만, 정치가 단지 링 위의 게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태도와 전방위적으로 관련되는 한, 가장 가까이 있는 타자와 반드시 화해할 믿음이 있는 한에서, 싸우는 것은 필연적인 윤리적 행위다. 사랑과 전쟁은 붙어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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