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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늘릴 것인가, '나'를 늘일 것인가 아메바(일반판)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최승호 (문학동네, 2011년) 상세보기 증식하는 유령들; 최승호, 아메바(문학동네, 2011) 등단 이후 꾸준히 독창적인 영역을 구축해온 최승호의 이번 시집은 자기 자신의 말들로부터 뻗어나간 실뿌리 같은 상상의 편린들을 그 원천들과 함께 수록하고 함께 읽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그가 인터뷰들에서 밝히고 있다시피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충분한 기획 의도를 가지고 수행된 것으로, 이번 시집의 출간이 시인 자신에게는 등단 이후 30여 년간의 자신의 詩作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로 여겨지고 있는 듯하다. 그는 이것을 ‘실험’이며 ‘일종의 문체연습’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연습은 ‘완성된 한 편의 시’라는 관념을 잠시 괄호 속에 넣고 ..
흑백의 밤 녹색의 불면증  아마도아프리카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이제니 (창비, 2010년) 상세보기 시인은 언제나 자신의 시가 너무 명백할까봐 걱정하고, 또 너무 모호할까봐 걱정한다. 어떻게 하면 잘 숨을 수 있을까. 그렇지만, 어떻게 하면 머리카락이 보이게 숨을 수 있을까. 어떤 시인들은 시가 재현하려는 대상의 전체가 지닌 뚜렷한 윤곽, 황금비율, 색채, 의미의 완전한 전달에 골몰하고, 또 어떤 시인들은 아직 드러난 적 없지만 (그래서 공상이나 망상으로 쉽게 오해받을 수도 있을) 세계에 편재하는 ‘무엇’의 손가락, 휙 돌아서 막 달아나며 사라진 실루엣에 불과한 뒷모습, 바람에 흔들린 옷깃 같은 단서들(만)을 독자에게 인색하게 제공한다. 이 기술들에 관해서라면 아마도 이제까지 제출된 모든 시론들을 다..
to Indimina  론 울프* 씨의 혹한 론 울프 씨가 자기 자신을 걸어 나와 불 꺼진 쇼윈도 앞에 서자 처음 보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하나의 입김으로 곧 흩어질 것 같은 그의 영혼. 그러나 이 순간 그는 유일무이한 대기의 조각으로 이 겨울을 견디고 있다. 그의 단벌 외투를 벗겨간 자들에게 그는 반환을 요구할 의사가 없다. 처음부터 외투는 그의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 겨울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는 친구가 셋 있었는데 하나는 시인, 하나는 철학자 그리고 자기 자신이었다. 그들은 자존심이라는 팬티만 걸치고 혹한을 견디려는 그의 무모한 결심을 존중해주었지만, 이 존중이 그의 저체온증을 막아주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는 스테판에게 말했었다; 저 육각의 눈 결정이 아름답다면, 보이지 않는 내 영혼의 아름..
김영승 선배님, 공개된 지면에 편지를 쓰라는 분부를 받고 이 편지를 쓰기까지 저는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남들이 볼 걸 뻔히 알면서 쓰는 편지에는 도대체 무슨 내용을 담아야 할까요. 그래서 마감 기한 최후통첩을 받고도 한참을 지나 선배님 단 한 분만 읽는다 치자 결심하고서야 겨우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선배님은 저를 모르시겠지만 저는 선배님을 20년 전부터 압니다. 고등학교 입학하자마자 들어간 문예반 반실에 놓여있던 날적이에 추상같은 2학년 선배가 어여쁜 글씨로 적어놓았던 「반성641」을 읽고 나서, 저는 반실 책장에 꽂힌 선배님 시집을 들고 학교와 집을 오가며 참 불온한 말들을 낄낄거리며 열심히 읽었더랬습니다. 굴헝같이 습하고 어둡고 서늘해서 이상하게 아늑한 문예반실에서, 동기들과 겨울이면 곱은 손가락을 호호 불며 갱지..
그녀는 요리를 멈추지 않았다 : 「요리사와 단식가」와 <301․302> 자연의 목소리와 같은 에고이스트는 없어. 자연의 목소리 속에서 우리가 확실히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모든 타인을 희생할지라도 알아서 쾌락을 구해야 한다는 만고불변의 성스러운 견해야. - 프랑수아 드 사드 금욕적인 수도자들은 비범해진다. (...) 그들은 다르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다른 곳에 있기를 갈망한다. (...) 다른 곳에 다르게 있기를 소원함에 담긴 위험성은 이 소원이 완전하게 실현될 가능성에 있다. - 마크 에드먼슨 왜 증상은 멈추지 않는가? - 자크 라캉 1987년 부근 넥타이 부대가 시청 앞 광장을 행진하던 1987년, ‘60년대산(産) 젊은 시인’ 장정일은 이 정치적 사건보다 몇 달 앞서 시집 을 출간하고, 이어 김수영문학상의 최연소 수상자가 되면서 문단에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이 시집..
동지, 자네의 섬뜩한 농담은 내 손이 호주머니 속을 더듬게 해 그러니까, 우리가 장난이나 한번 쳐볼까, 하고 모였던 것은 지난겨울의 일이었다. 나는 거의 우연을 가장한 운명의 방식으로 (아니, 운명을 가장한 우연의 방식인가?) 그와 함께 동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동인 활동이란 건 대체 무엇인가? 한 30년 전쯤이라면 역사적이고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문학적인 대의명분이라도 있었겠지만, 시의 시대도 지나가고, 가시적인 적들의 적성(敵性)은 단물처럼 대기에 비가시적으로다가 녹아들고, 나름 교체된 정권도 한동안 살아보고, 지금은 상냥한 얼굴로 뒤통수를 쳐대는 교활한 적의 품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그래서 결론적으로 온갖 고민들이 문화적인 형태로 세련되고 교양 있는 취미의 자원을 이루게 된 지금, 21세기 시작하고 한 10년 지난 다음에 축구단이나 야구단도 아니고 동호회..
할례 전야, 유-토피아의 말문 앞에서 : 뷔히너, 첼란, 데리다의 유령 회합 (일전에 어느 모임을 갔더니 B, C, D라는 세 사람이 모여 앉아 무슨 이야기인가를 하고 있었다. 보아 하니 앞서 두 사람은 이미 이야기를 끝냈고, 세 번째 사람은 두 번째 사람의 말을 이어받아 골똘한 얼굴로 떠듬 떠듬 이어가고 있었는데, 도무지 만연체의 문장을 끝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슨 대화를 나누었기에 이 사람은 이렇게 울듯한 표정이 되어 눌변을 힘겹게 이어나가고 있는 것일까? 그가 좀처럼 속 시원히 털어놓지 않기에 나는 한 사람씩 찾아가 따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였다. 이제 내가 듣고 생각한 바를 여러분에게 전한다.) 1. B씨의 시계와 달력 : 유토피아? 레옹스 : 그럼 우리 시계란 시계는 모두 때려 부수고 달력은 금지합시다. 시간 가는 거와 달 가는 걸 꽃 시계에 맞춰 세어보자고. 꽃이..
우리가 만일 아무짝에도 쓸모없대도  어깨위로떨어지는편지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이기인 (창비, 2010년) 상세보기 이기인 두 번째 시집의 주인공은 얼핏 농부, 비정규직 노동자, 노인, 공장 노동자, 노숙자로 나타나지만 실은 사물들, 도구적 사물들인 것 같다. 시인은 첫 시집에서는 인색했던, 경험 주체의 순하고 담백한 목소리로 신산한 삶을 고백하는 한편, 관찰자적인 묘사를 적극 활용하여 사물-주체/대상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존재론적인 시선을 심화시키고 있다. 가령, 시집에서 드물지만 매우 고백적인 시 「쌀자루」의 한 구절에서 “돈으로 환산이 불가능한 미발표 시의 제목을 바꾸는” 가난한 1인칭 시인 화자의 쓰디쓴 고백(“아이들 것은 그렇다 치고 저 잘난 나의 수저는 왜 이토록 입이 큰가”)에는 얼마간 수줍음이 서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