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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review

세계를 늘릴 것인가, '나'를 늘일 것인가

아메바(일반판)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최승호 (문학동네,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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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식하는 유령들; 최승호, 아메바(문학동네, 2011)


등단 이후 꾸준히 독창적인 영역을 구축해온 최승호의 이번 시집은 자기 자신의 말들로부터 뻗어나간 실뿌리 같은 상상의 편린들을 그 원천들과 함께 수록하고 함께 읽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그가 인터뷰들에서 밝히고 있다시피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충분한 기획 의도를 가지고 수행된 것으로, 이번 시집의 출간이 시인 자신에게는 등단 이후 30여 년간의 자신의 詩作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로 여겨지고 있는 듯하다. 그는 이것을 ‘실험’이며 ‘일종의 문체연습’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연습은 ‘완성된 한 편의 시’라는 관념을 잠시 괄호 속에 넣고 하나의 상상 덩어리로부터 여러 각도로 뻗어나가는 상상의 촉수들을 따라가 그 촉수들이 매만지게 되는 각기 다른 형태와 색깔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최승호의 상상의 패턴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생각된다.

이 시집의 중요한 동력학은 자극과 반응으로 이루어진다. 과거에 쓰인 시가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상상을 이끌어갈 수 있음을 실증하는 이 실연 행위(performance)는 과거의 시구들이 여전히 살아있는 인화물질처럼 작용하고 있음을 실증하는 것으로(성냥알 같은 정신이여, 와서 부딪쳐라!), 시인 자신도 자신이 쓴 시에 대하여 우선은 엄연한 하나의 독자임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자기 안에서 나왔으되 자기 상상의 육화인 시 자체는 독립적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다짐이라도 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완성된 한 편의 시’라는 관념에 우리가 종종 적용하고 싶어 하는 그 ‘완성도’를 괄호 속에 넣었을망정, 여전히 이 실연 행위에는 일정한 형태가 부여되어 있다. 어쩌면 이 ‘시의 완성도’라는 우리의 관념이 의미하는 것에 관해 자기 자신과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이 관념은 ‘하나의 의미에 집중하라!’는 것이었고, 이 의미를 위해 달리는 이미지들의 헌신도가 그 깊이를 결정해 왔다. 특히 최승호는 자신이 오랫동안 중점적으로 표상해온 ‘죽은 채 살아 있는 세계’를 그리기 위해 심리와 실재가 뒤얽힌 한 덩어리의 사건이나 상황의 충실한 제시에 열중해 왔었다.
 

가령 「54 상표」는 시집 대설주의보(1983)에 실려 있던 시 「통조림」의 결구에 대한 반응들로 이루어져 있다. 「통조림」은 “나는 죽어서는 기꺼이 썩어지겠다.”는 결심으로 출발하여 죽은 쥐의 얼룩이 점점 넓어지는 천장을 바라보며 사방 벽에 갇혀 있는 자기 자신의 삶을 통조림에 비유하면서, 살아 있지만 이미 죽어 있는 지리멸렬한 삶에 대한 냉정한 반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30여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뒤 시인은 이 시의 결론, “상표가 화려한 통조림/국물에 잠겨 있는 통 속의 송장덩어리,/웬만한 양념으로는 이미/이 맛은 변치 않는 삶은 송장 맛이 아닐는지”로부터 다음과 같은 시구들을 새끼 친다.


54-1


통조림 뚜껑을 따니

지느러미 없는 꽁치들이 빽빽하게 들어 있다


54-2

디오게네스를

통 속에서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디오게네스가 아니었을까


54-3

얼굴이 상표인

통조림 같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점점 큰 상표를 펼쳐 보인다


54-4

정말 큰 아코디언의 주름은 무한대로 펼쳐져 있다

그걸 연주하려면

무한을 감싸안는 긴 팔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분열하는 연들이 시가 쓰인 순서대로 정렬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통조림」의 결구가 없었다면 위 시행들에서 숫자를 없애고 늘어놓아도 완성도 있는 한 편의 시로 읽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독자는 이 시(들)을 54와 54-1, 54와 54-2...처럼 모체와 각 연을 붙여서 읽을 수도 있고, 또 순차적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럴 때 전통적인 시형이 보여주는 이미지의 종합은 아닐지라도 개념의 종합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이 시행들은 변이에 변이를 거듭하는 가족유사성을 지녔다. 54-1의 (날개 없는 새나 수족 없는 사람처럼 자유의지를 거세당한) “지느러미 없는 꽁치들”은, 여전히 죽었으면서도 삶아져서 썩지도 못하고 가지런히 순종하는 주체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고 있으며, 이것은 54-2의 ‘통 속의 디오게네스’에서 보다시피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일차적으로 자기 의지의 문제일지 모른다는 성찰, 54-3에서 부자유스러운 순종적 주체들이 심지어 자기의 얼굴을 상표처럼 펼쳐 보이는 뻔뻔스러움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고, 54-4는 “펼쳐 보인다”는 54-3의 결구로부터 다시 ‘무한대로 펼쳐진 아코디언의 주름을 연주할 무한을 감싸안는 긴 팔’, 즉 어떤 포용적인 위대한 영혼, 혹은 절대자나 법칙의 필요에 대한 숙연한 가정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이 상상의 과정은 분명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에 관한 인식을 ‘펼쳐 보이는’ 나름의 기승전결을 가지고 있지만, 이제까지 시인이 보여주고 있었던 하나의 사건이나 상황으로부터 의미를 이끌어내기 위해 필요했던 묘사의 공정을 상당 부분 생략한 채 각 연이 하나의 즉각적인 반응이며 동시에 하나의 집합을 이룬다. 이 과정을 ‘분절된 이미지의 과잉’으로 불리우던 최근의 어떤 경향의 시들을 통해 추정될 수 있는 시작 과정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내간체를얻다(일반판)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송재학 (문학동네,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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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통이 되어가는 귀; 송재학, 내간체(內簡體)를 얻다(문학동네, 2011)

 

토를라이프 보만의 개념을 빌리자면, 최승호가 취하고 있는 시적 태도가 보다 시각-인식 중심적이라면 송재학의 시는 청각-감각 중심적이다. 오감이 발달하지 않고 어찌 시인이 될 수 있을까만, 시각-인식의 극단과 청각-감각의 극단을 양 끝으로 하는 선분의 어떤 스펙트럼을 가정할 때 송재학은 청각-감각의 쪽에 보다 기울어져 있다. 이때 청각 중심적이라는 말은 단지 형태나 색채보다 소리에 더 집중한다든가 음률에 맞추어 시를 짓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청각 중심의 사유방식은 예민한 오감을 통해 감각한 세계의 비가시적인 힘을 의식하며, 마치 음악의 진행이 그러하듯이, 전체를 일별하는 대신 감각된 음성적, 시각적 이미지를 하나하나 건축적으로 쌓아가는 방식을 취한다. 이때 이 건축은 설계도가 없이 이루어진다. 청각적 사유의 주체는 지금의 이 감각 이후에 어떤 다른 감각이 올지 계획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청각중심주의의 주체는 덜 분석적이지만 세계를 채우고 있는 그 모든 감각의 대상들이 뿜어내는 일정한 힘을 의식하고 있으므로 모호한 종합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에게 앎은 감각을 의미하며 이런 의미에서 그의 이번 시집 표제를 포함하고 있는 시 「늪의 내간체(內簡體)를 얻다」가, 통상 남성보다 감성적이라는 의미에서의 여성의 목소리로, 둘도 없는 지음(知音)인 자매간의 서간 형식을 띠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이것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는데, 제목인 ‘늪의 내간체를 얻다’가 화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시인 자신의 의미 부여이며, 시의 바깥에서 가능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소리’와 ‘물’, ‘물고기’ 등의 이미지는 마치 이 부유하는 감각과 흐르는 감성이, 분석하고 설계하며 일정한 구조적 세계 인지를 바탕으로 하는 인식에 대해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지리멸렬한 비극적 세계 속의 최승호의 시적 대상이, 자주 죽어가거나 죽어서 삶아지거나 절여지거나 말려진 생선으로 대변되었던 점을 상기해 보라. 최승호의 “삶은 송장 맛”(이라는 인식)은 ‘인식의 끝에 비극이 있다는 인식’과 성찰의 산물인 반면 송재학의 “지금 읽지 않는다면 비늘 떨구며 시나브로 사라질 소리”(「소리책(冊)」)는 아무리 ‘눈물’이라는 낱말을 많이 사용하고 때로 슬픔과 아련한 그리움을 전할지라도, 근본적으로는 지금-여기에서 생의 감각을 낙관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생선에 대한 입맛이 변하는 감각의 사람이고(「생선」), 이 변개하는 입맛은 현존하는 차이들에 관대하며, 이 관대함은 세계와의 싸움이 아니라 화해를 지향한다. “오늘 가지 못하면 내일이 있고 다행스럽게 내일은 늘 오늘이기도 하다.”(「하트갈에서 무렁 가는 길」) 이 감각은 저 감각으로 대치되면서 산문 형식의 단시들을 축조해내는데, 시각적인 전체 윤곽을 제시하는 대신 악보의 음표 같은 이미지들의 환유로 이어진다. 그는 근본적으로 서정에 몸 담근 자인데, 서정에 몸 담근 자의 궁극의 바람은 스스로 서정이 되는 것이다.

 

씻어내려고 게워내려고 하지만 소리는 이미 내 귀를 나팔꽃 닮은 공명통으로 바꾸는 중이다

-「소리족(族)」 부분


내가 우는 게 아닙니다 징이 우는 게 아닙니다 귀 기울이는 당신도 울고 있지 않지만 울음은 모두를 감싸고 돕니다

-「누선(淚腺)」 부분




이처럼 자기 자신, 소리의 수용체이자 공명통인 울림의 장이 되고자 하는 바람은 “내 시의 안팎이 풍경만이 아니고 상처의 안팎이기도 했으면 좋겠”다는 자서에서도 드러나는 바, 객체화된 풍경을 일별하고 그것을 그린 후 완상하는 대신, 자기 자신 동일화되어 남김없이 살아내고자 하는 서정 시인의 충실한 소망이다. 이런 시인이 여행 중에 발견하는 것은 이국적인 새로움이 아니라 공감을 바탕으로 한 인인(隣人)의 인지상정(人之常情)인데, 「머린호르(馬頭琴)와 낙타가 우는 밤」의 짠한 감동은 이웃을 이르는 듯한 그의 다정한 호명과 독자로서는 들어본 적 없는 ‘죽은 나라까가 깔깔 웃는 듯한’ 마두금의 소리에 대한 상상으로부터 올 것이다.



요즘우울하십니까(일반판)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김언희 (문학동네,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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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하는 입; 김언희, 요즘 우울하십니까?(문학동네, 2011)

 

지젝은 언젠가 ‘남성의 징후로서의 여성’이라는 라캉의 악명 높은 개념을 설명하면서 “man literally ex-sists (...) Woman, on the other hand, (...) insists."(“Rossellini: Woman as Symptom of Man.” In October, Vol. 54. (1990))라고 쓴 적이 있는데, 나는 그가 이렇게 적으면서 독자가 이 말놀이를 반쯤 웃으며 읽기 바랐을 것이라 상상해본다. (이것을 “남성은 외-존하는 반면, 여성은 내존한다”고 번역하는 대신, “남자는 그냥 있지만, 여자는 고집한다”로 읽어보라.) 성차만큼 ‘차이’에 관해 웃어넘길 수 없는 문제는 아마 정치와 종교 정도일 텐데, 정치와 종교는 최소한 그 강령에 신념을 기댄 집단의 공존을 가능하게 하지만, 성차는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진 사회의 최소단위를 구성하면서 어디에나 편재하는 갈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성이라는 증상 속에 자신을 투사하면서 자기 바깥에 존재하는 남자와, 고스란히 ‘그’의 증상이 되고도 언제나 알 수 없는 초과로 고집스럽게 존속하는 여자는 또 다른 여자와 남자 개체들을 생산하면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된다. 정신분석학의 외디푸스 삼각형은 당신의 세계가 집안에서 생성되었다는 단순하고도 충격적인 사실의 세부를 낱낱이 폭로하면서 당신을 공황상태에 빠뜨린다. 세계는 이 거푸집에 덧붙여지고 불어나고 다른 인자들을 첨가하며 생성된다. 서로에게 완전한 타자인 이들에게 대체 어떻게 사랑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세계의 기저가 분열에서 시작되었음을 용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말인가?


나는 참아주었네. 아침에 맡는 입 냄새를, 뜻밖의 감촉을 참아주었네, 페미니즘을 참아주고, 휴머니즘을 참아주고, 불가분의 관계를 참아주었네. 나는 참아주었네 오늘의 좋은 시를, 죽을 필요도 살 필요도 없는 오늘을, 참아주었네, 미리 써놓은 십 년치의 일기를, 미리 써놓은 백 년치의 가계부를, 참아주었네 한밤중의 수수료 인상을, 대낮의 심야 할증을 참아주었네 나는, 금요일 철야기도 삼십 년을, 금요일 철야 섹스 삼십 년을, 주인 없는 개처럼 참아주었네, 오로지 썩는 것이 전부인 생을, 내 고기 썩는 냄새를, 나는 참아주었네, 녹슨 철근에 엉겨 붙은 시멘트 덩어리를, 이 모양 이 꼴을 참아주었네, 노상 방뇨를 참아주었네, 면상 방뇨를 참아주었네, 참는 나를 나는 참아주었네, 늘 새로운 거짓말로 시작되는 새로운 아침을, 봄바람에 갈라터지는 늙은 말 좆을.

-「나는 참아주었네」 전문.



화자와 불가분 구별 불가능한 시인의 근질근질한 입은 자신이 참아온 대상들을 열거하고 또 열거한다. 참음은 집안에서 시작되고(“아침에 맡는 입 냄새를”) 뻔뻔한 행정과 이웃과 반복되는 의례에 대한 굴욕적인 버티기로 이어지며 이 굴욕을 견디면서 비롯된 노예 상태에 대한 자기혐오에까지 이른다. 김언희도 역시, 최승호와 마찬가지로 세계가 부패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최승호가 그것들을 차갑게 비판적으로 묘사하는 것과 달리 고집스럽게 이것들에 대한 분노와 냉소를 요설과 외설로 쏟아낸다. 그녀는, 그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면서, 무시무시하게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세계의 무가치함을 열렬하게 주장함으로써 마음에 들지 않는 세계와, 그것을 견디고 있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자기를 배설하는 제스처를 선택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아이스크림마저 “콘에 담긴 백색 대변들”(「해변의 묘지」)로 보이는 “흰자위 하나에 검은자위가 둘”인 그녀의 눈은 위선의 “잎사귀로 가려”진 것들의 상징적 의장을 모조리 벗겨버리고 싶은 충동으로 불타고 있다. “사실/잎사귀로 가려야 했던 것은/성기가/아니었잖아?”(「9999 9999 9999」) 이 불타는 눈의 충동은 좀 더 생짜의 현실, 좀 더 충격적인 진실, 좀 더 가공되지 않은 사실에로 향하고, 양기가 한껏 몰린 입은 이 충동에 관해 침묵할 의향이 없다. 위에 인용한 시는 그녀의 시의 특징인 반복 어법이 그녀가 관찰하는 세계의 반복적인 양상을 본뜨고 있음을 보여준다. 송재학의 감각적이고 포용할 만한 나날의 세계가, 김언희에게는 “늘 새로운 거짓말로 시작되는 새로운 아침”이다. 그녀는 ‘진짜’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를 내놓으라고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가 아니라면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배설물에 불과하다는, 시집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극언은 우아하기보다는 막강하다. 세계에서 가장 큰, 악취를 풍기는 꽃, 꽃이며 배설물인 아모르포팔루스, amour for phallus? “적당하게 더러운 인생보다 더, 더러운 인생은, 없어, 아모르, 아모르포팔로스, 아직도 무엇이, 모자란다 더, 추잡한 무엇이, 더 기름진, 무엇이”(「아직도 무엇이」). 이것은 ‘진짜’에 대한 압도적인 충동이 보여주는 숭고의 세계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의 거대한 팔루스다. 이 무시무시한 요구 뒤에 도사리고 있는 그림자는 무엇인가?

 

사마귀

였다, 버썩버썩

내 뒤통수를 씹는 음탕한

턱주가리, 노모(老母)

였다, 스물네 시간 입덧을 하며

(...)

송장이 되어 내 배 위에서

굴러떨어져다오, 네가!

-「사마귀」 부분


나는 무화과를 쭉쭉 소리 내어 빤다


너무 달콤해서 눈이 떠지지 않는


무화과의 입속 귀자(鬼子)야 귀자야


입에 짝짝 들러붙는 몸주의 입


입에 입을 맞대고 나는 귀모(鬼母)를


귀모는 나를 쭉쭉 소리 내어 빤다

-「밀통(密通)」 부분


죽일 듯이, 죽을 듯이 기다리는 어머니

-「그늘왕거미」 부분


그 모든 애증의 근원처럼 보이는 어머니. 어머니에 대한 동성애이자 근친상간 충동인지 존속살해의 충동인지 구분이 안 가는 이것은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밀통”의 결속을 확인하는 끔찍한 향락 속에서 그를, 그 모든 굴욕에도 불구하고, 견디도록 한다. 강박적인 어머니와 외설적이고 초과적인 분노하는 딸이 보여주는 실재의 공포는 브라이언 드 팔머의 전설적인 공포영화 <캐리(Carrie)>의 그것을 닮았다. 이 참혹한 공포는 거리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하느님이 정말로 ‘아버지’라면, 그는 이 무시무시한 모녀관계를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키르티무카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함성호 (문학과지성사,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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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락하는 방랑자의 경전; 함성호, 키르티무카(문학과지성사, 2011)

 

이런 김언희와 달리 ‘어머니를 사랑하는 아들’ 함성호가 써온 시들 중에서도 유독 아름다운 서정 시편들은 대개 어머니를 호명하고 있다. 첫 시집의 「내 손주박 안에서 넘치는 바다」나 聖 타즈마할의 「태실(胎室)」, 이번 시집에 수록된 「보이저 1호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연작은 모두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다. 어머니만 생각하면 서정적이 되는 이 남자가, 그렇지 않을 때는 대단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은 징후적이다. 시작 초기부터 양식 파괴적이고 실험적인 시편들에서 그의 언술행위는 광범위한 문명 비판에 걸쳐 있었고, 이 계열의 시편들은 신화와 설화, 경전 들을 참조점으로 포섭하면서 스스로 경전이 되려는 의지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을 쓰는 경전 기자는 초인(이 되어가는 자)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시집은 출간이 거듭될수록 각주가 늘어나는데, 일찌감치 고독은 56억 7천만 년이나 되도록 유장하고 ‘모더니즘의 손목을 잘라버린 聖 타즈마할’(聖 타즈마할의 자서)만큼 거대한데, 자기를 먹어치워 “얼굴 하나만 달랑 남은”(자서) 이 허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인가. 신이 된 괴물, 키르티무카는 얼굴만 남아서도 말씀을 멈추지 않는다. “상징은 늘 허기 쪽으로 기운다.(...)(이 욕망의 그늘에 정처는 있나?)”(「3. 봄밤 강화(講話)」) 신화 속에서 키르티무카 자체가 욕망에 사로잡힌 삶에 대한 상징이다. 그는 설화, 신화, 영지주의 경전 등으로부터 받은 영감과 자신의 정신 사이에 일어난 화학반응의 파편들을 죄 기록하려 하고, 이 파편들 사이의 연결 관계(모든 것은 운명처럼 우연히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를 통해 또 다른 경전을 만들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 경전은 거룩하고 숭고한 신의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삶의 극명한 상징으로서의 키르티무카에로 귀속된다. 그는 우리가 ‘신’ 개념에서 종종 떠올리는 전지전능한 절대자가 아니다. 키르티무카의 세계에 그와 같은 개념의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다 복음서 이전에도 나는 이 세상이 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불완전한 조물주의 실패작인 걸 알고 있었다.”(「2. 어부림의 청중들-자살자들」) 만일 이 경전의 주인이 인간이되, 쇠락함으로 위대해지는 인간이라면, 그는 과연 차라투스트라의 친구일 것이다.


자세히 보면 비교적 짧은 시들을 제외한 이번 시집에 실린 그의 시들이 그간 그의 자서들이 그러했듯 단정적인 선언문투로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는 10여 년 전에도 「선언문」에서 유나바머의 ‘은유로 가득 찬 테러’에 경의를 표시했고(聖, 타즈마할) 그보다 더 오래전에 “인류여 멸망하자―”(「타르쵸」, 56억 7천만 년의 고독)는 환멸의 고백을 적기도 했었지만, 이번 시집처럼 격렬하게 내달리지는 않았었다. 이미 “언어는 기호가 아니라 자취이며 흔적이다.(...)‘절제된 시어’라는 고정관념은, 나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마이너스적 과잉에 지나지 않는다.”(聖 타즈마할의 자서)고 했지만, 여전히 서정시의 비중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시집의 경전적인 성격은 유례없이 혼돈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이 혼돈은 하나로 수렴되는 외부의 꼭짓점 같은 개념을 배제하고 모든 것을 쓰는 것이며 그때 필시 앞에 쓰여진 것은 예언의 말씀이 된다. 원인과 결과는 서로를 중층결정하고, 히스테리의 역사는 증상과 트라우마의 자리를 뒤바꾼다. 예언은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다. 언젠가는 모든 일이 어디에선가 일어나는 것이다. 혹시 이것은 하나마나한 말인가? 쓰나마나한 글인가? 세상 모든 글과 마찬가지로? “(상징을 얻는다는 것은 세계를 얻는 것이고, 동시에 전체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모든 과거는 │미래=망각│의 거울 속에 저장되고

나는 새롭게 본 걸 죽이고 다시 창조한다

(...)

시간의 파랑이 뒤집히고

처음과 끝이 서로를 애무하는 상실이―, 세상의 끝에서 돌아선 자는,

거기에서 스스로의 끝을 보게 되리라


가자!

-「감각의 입체」 부분

 
되돌아간다, 또 되돌아간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새로운 것일까?

-「(여지없이)」 부분

 

이미 “실패작”인, 해설자가 “연옥”이라 칭한, 환멸과 환희가 반복되는 이 전체에 관한 전언은 끝없이 되풀이된다. 맥락상 이 반복은 마치 문명의 공격과 자연의 복수가 되풀이되는 지구의 오랜 역사와, 혹은 생성과 소멸을 영원히 되풀이할 우주의 운명과 닮은 듯하다. 이 운명은 한 인간과 벌레에게도 프랙탈 구조로 연결되어 있다. 무와 유의 언제나 새로운 되풀이. 그러나 그것이 무한하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동일하다는 허무. 새로움과 허무함은 그렇게 언제까지나 자리를 바꾼다. 아름다운 연작시편 「보이저 1호가 우주에서 돌아오길 기다리며」가 한 편은 “왜 무가 아니라 유일까?”를, 또 한 편은 “왜 유가 아니라 무인가?”를 부제로 달고 있음은 이 반복에 대한 반복적인 인식을 드러낸다. 지구의 언어를 이해해줄 누군가를 찾아 각국의 인사말과 90분짜리 클래식 음악 레코드를 싣고 150억km 떨어진 텅 빈 우주를 방랑하는 보이저 1호는, 아무튼 유한하지 않다면 수억 겁의 세월동안 돌고 돌아 같은 자리로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우주는 그렇게 생겼다고들 하니까.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영원을 가정하는 개인의 정신이 그러하듯, 영원한 것은 없으므로, 그를 기다려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나에게는 당신들의 바깥에 있을 자유가 있다”(「2. 어부림의 청중들-당신들의 바깥」). 그러나 그 바깥에서 ‘나’와 동행하는 것은 혼잣말이 될 운명인 수신될 리 없는 편지와 깊고 유장한 고독. 이 대단위의 비애. (그러나 정말, ‘바깥’은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 ‘바깥’은 우주가 아니라 애초에 보이저가 만날 예정이었던 미지의 누군가가 아닐까? ‘바깥’에 존재할 자유는 나 아닌 그 미지의 타자를 가정해야 유의미하지 않을까? 시바, 혹은 하느님 어머니, 이 끝나지 않는 고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소서.)

 

토마토가익어가는계절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이준규 (문학과지성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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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사하지 않기 위하여; 이준규,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문학과지성사, 2010)

 

함성호가 될 수 있는 한 ‘안’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정신과 육체의 방랑을 지속하며 ‘바깥’에 대한 상상의 가능성에 몰입하고 있다면, 이준규는 이 세계 안에서라도 확고하게 존재할 수 있는 차선의 상태(그리하여 ‘안’의 사고 체계에서는 최상의 상태)를 구현할 조건을 급진적으로 파고든다. 급진적이라는 말은 그가 발 딛을 바닥을 절망적으로 구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는 끊임없이 기저를 찾는다. 기저의 기저를, 기저의 기저의 기저를 찾는다. 거기에서 그가 마주치는 의문들, 헛것과 실재는 어떻게 구분되는가, 나는 그인가 너인가 그녀인가 우리, 혹은 그들인가, 시는 어떻게 시작될 수 있는가, 새 한 마리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자기의 자율에 따라’ 옮겨가는 행위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질문들은 ‘나’와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온전히 나일 가능성’에 대한 충실한 천착으로서의 시 쓰기를 달성한다. 좀 길지만 다음 시를 인용해본다.

 

검은머리방울새는 오리나무숲에 살았다.

이 문장은 무한히 반복해도 좋으리라.

그러니까 검은머리방울새는 오리나무숲에 산다.

검은머리방울새는 쮸잉쮸잉쭈잇쭈잇 울었다.

검은머리방울새는 방울새나 촉새처럼 또륵또륵또륵또르륵또르르륵 울거나 찌리찌찌리찌찌쪼찌리찌 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검은머리방울새는 그냥 쮸잉쮸잉쭈잇쭈잇 울었다.

검은머리방울새가 현실에서 어떤 울음을 운다면 그것은 꿈을 꿀 때뿐이기 때문이다.

검은머리방울새가 침묵할 때는 다른 모든 새들이 침묵할 때와 동일한 침묵을 침묵한다.

침묵을 침묵할 수 없어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검은머리방울새는 어느 날 문득 아무것도 아무것과 구분할 수 없었다.

검은머리방울새는 전체는 전무,라고 외친 후 홍방울새를 생각해보고 완전한 침묵을 시도했다.

그 제스처로 혀를 뽑아버렸다.

그러면서 검은머리홍방울새는 생각했다.

이젠 내게 제스처만 남았고 제스처로 살다 제스처로 떠나 제스처 그 자체가 되어 제스처로 표상될 것이다.

그 후론 검은머리방울새는 침묵의 그림자를 오랫동안 응시하는 습관이 생겼다.

하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검은머리홍방울새는 검은머리홍방울새로 영원히 동어반복되기 때문이었다.

침묵의 그림자는 쮸잉쮸잉쭈잇쭈잇 흔들리고 있어 매우 시끄러웠다.

검은머리방울새는 참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오리나무숲에는 큰불이 났고 검은머리방울새는 어어, 어이가 없었다.

쮸-잉 쮸-잉 쭈잇 쭈잇. 쮸-잉 쮸-잉 쭈잇 쭈잇.

검은머리방울새는 오리나무숲에서 죽었다.

-「검은머리방울새」 전문

 

이 시 한 행 한 행에 담긴, ‘자기 자신이 되려는’ 고심의 흔적을 그대로 지나치지 말기 바란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검은머리방울새라는 주인공이 오리나무숲에 살다가 울다가 침묵하다가 산불로 죽었다는 썰렁한 서사로 요약되는 것 같지만 실로 삶과 죽음 사이에 자기 자신으로 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진지한 고민과 그 난감함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이 시가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의 2/3 분량에 육박하는 「문」의 축약본이라고 생각한다. “검은머리방울새는 오리나무 숲에 살았다.” 이 운명처럼 주어진 인물과 장소는 사후적으로 검은머리방울새의 죽음의 조건을 결정한다. 이 사실만을 무한히 반복한다 해도 시인은 자기 자신에게 더 이상의 무언가를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검은머리방울새가 오리나무숲에 살면서 그곳에서 죽었다는 사실, 오리나무숲에 살다가 백양나무숲으로 옮겨갈 수 없었다는 사실, 오리나무숲에 살다가 몇 개의 알을 낳거나 낳지 않았다는 사실, 그 모든 다른 가능성들은 지나치게 상상적이다. 그렇게 거기 사는 자기 자신으로서의 검은머리방울새는 검은머리방울새의 언어로 운다. 그가 ‘방울새나 촉새처럼 울 수도 있었지만 그냥 쮸잉쮸잉쭈잇쭈잇 울었다’는 것은, 검은머리방울새가 방울새나 촉새처럼 울 수 있다면,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 상상적으로만 가능한 것일 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울기’와 ‘울음을 울기’의 차이이며, 이어지는 ‘침묵’과 ‘침묵을 침묵하기’의 차이이기도 하다. “침묵을 침묵할 수 없어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은 검은머리방울새가 꿈에서나 방울새나 촉새처럼 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침묵을 침묵하기’가 상상적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행위는 어쩔 수 없이 행위 주체의 흔적을 남긴다. 검은머리방울새의 성문(聲紋)처럼, 그것은 변경되지 않는다. ‘나’는 왜 ‘나’인가? 검은머리방울새는 왜 검은머리방울새의 울음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가? 검은머리방울새와 촉새와 방울새의 서로 다른 울음소리는 너무나 동등하게 달라서 ‘전체는 전무’가 되어버린다.

다른 성대를 가질 수 없다면, 울지 않아보는 것은 어떤가. 검은머리방울새는 홍방울새를 생각하고 완전한 침묵을 시도해본다. 모두가 울음소리로 자기 자신을 고지하고 있으니 울지 않음으로써 고지하는 자기 자신만큼 자기 자신인 것은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검은머리방울새의 혀를 뽑고 검은머리홍방울새가 되어본다. 그런데 이것은 자기기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검은머리홍방울새는 자기가 자기 제스처의 표상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검은머리방울새의 울음을 울지 않으니 더 이상 검은머리방울새도 아니지만 검은머리방울새가 머리가 붉은 홍방울새가 ‘실제로’ 될 수도 없고 더군다나 제스처를 ‘저질러버렸으니’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침묵의 그림자를 응시하는 것’뿐. 그는 이제 검은머리홍방울새로서의 자기 자신을 벗어날 수 없고 혀를 뽑기 전의 울음소리마저도 상상적으로만 가능해졌다. 이 일을 어찌할 것인가. 발설되지 않는 모든 것이 과거의 자기 울음소리로 상상 속에 울려 퍼질 때, 검은머리방울새는 속으로 울면서 죽는다. 검은머리홍방울새로서가 아니라 검은머리방울새로서 죽는다. 제스처 이후의 울음은 모두 혼잣말이 되어버렸다.

‘영원히 동어반복되는’ 자기 자신을 벗어나기 위한 행위들이 또한 자기 자신을 가두다가, 자기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사건을 맞이했을 때, 이 ‘더욱 더 자기가 되고 싶어 자기를 벗어나려던’ 검은머리방울새의 절망과 안간힘은 무의미한가? 어떤 상상적 행위도 영향의 불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므로 아무도 모사하지 않으려 무한한 반복을 감행하는 이 시인의 급진적인 자율의 몸짓이? 바로 지금, 딸기도 복숭아도 ...n도 아니고, 다름 아닌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

- <문학동네> 2011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