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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review

저 거대한 눈이 쏘아 보내는 가시광선



생의빛살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조은 (문학과지성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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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빛살’이라는 제목은 얼핏 삶에 대한 긍정과 희망에 찬 주광성(走光性)의 노래들을 담고 있을 것 같지만, 이 시집의 시들은 민감한 동공을 가진 자의 통증에 관한 노래다. 그는 빛이 주는 고통을 감내하기 위해 종종 서늘한 그늘로 들어가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찌르는 듯한 이미지들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눈을 감아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얼핏 조은은 삶과 죽음, 빛과 어둠 같은 대립적인 언어들 사이에서 편향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이 대립항들은, 대개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돌면서 모순으로 가득 찬 삶에 동력을 부여하는 톱니바퀴들이다. 그렇지만 이 모순조화의 세계를 순하게 받아먹지 못하고 사방에서 그것을 발견하는 자는 이 모순의 실체가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되새긴다.

 

과장된 의미처럼

발목을 잡으려는 늪의 반짝임처럼

흑심이 있는 선물처럼

 

닿아보고 싶은

한 세계를 보았다

-「모순 2」 전문

 

 시인은 ‘닿아보고 싶은 한 세계’를 ‘보았다’. 그때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세계는 ‘의미’나 ‘반짝임’이나 ‘선물’처럼 달려가 풀어보고 싶은 욕망을 불러 일으켰지만, 그것은 ‘과장되’거나 ‘발목을 잡으려는 늪’이거나 ‘흑심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이 ‘처럼’의 구조를 그는 파괴하고 그 세계로 뛰어들 수 있었을까. 내가 나를 잃어버릴 것 같은 느낌, 이 삶을 망쳐버릴 것 같은 느낌, 헤어나올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너무 아름다운 것은 즉각 죽음을 암시한다. 욕망이 솟아오를 때 유혹과 공포는 공존한다. 그가 어떤 세계를 보았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유혹에 ‘데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마도, 그가 자기의 ‘눈’을, 그리하여 ‘눈들’을 가장 두려워하는 이유는 눈빛(들)이 쏘아보내는 욕망일 거라고 짐작할 뿐. “혼자 거울을 보며 앞머리를 자르다가”, 마주친 적 없는 켜켜이 쌓인 기억의 심층으로부터 소환된 자기의 눈들을 마주친 시인은 메두사처럼 제 눈(들)을 보고 얼어붙는다. “새카만 눈들이 거울 면에/다글다글 달린다”(「기억의 심층」). 비로소 자기(들)과 만났으나 ‘폭우 속, 바위 안, 난간 위에서 나를 보는’ 과거의 눈들이 지금의 나를 ‘기억한다’. 눈들은 제가 본 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그것은 고스란히 각인된다. 어쩌면 이 눈은 현재의 신체적인 눈이 아니다. “한 번도 소멸을 지켜보지 못했던/내가 살았던 집들”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봤을 시간의 눈동자”(「골목길」). 시인이 가정하는, 어쩌면 시인 자신이 그의 ‘보려는 욕망’을 확고한 상상으로 실현하는 시간의 절대적인 눈은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라는 시인의 경험론을 존재론적으로 완성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시광선이 어떻게 존재를 보증하는 동시에 시인을 고통스럽게 만드는지 이해하게 된다. ‘껑충한 해바라기꽃이 덮고 있는 집’에서 “꽃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면” “파리한 빛의 파편이 날아다녔다/빛은 살 속으로 몰려들며/잠든 고통을 되살려냈다”(「해바라기」). 하늘의 거대한 눈인 태양의 조각들을 나누어가진 꽃들과 눈들. 빛은 보려는 욕망으로 삶을 살려두면서 또한 그 욕망의 피로를 짊어지게 하였다. 그리하여 음산한 숲은 평화로운 죽음을 암시하고(「밤새 무슨 일이」, 「어떻게 알았을까」), 피곤한 가시광선으로부터 벗어난 시인은 어둠을 먹물처럼 머금고 죽음과도 같은 글쓰기의 준비를 마친다. 그것은 들림(聽音)의 세계, 가사(假死)의 세계다. “어둠 속에서 누가 내 이름을 부른다(...)묵직한 어둠이 내 목을 감는다/어깨를 감싼다/눈을 지그시 들여다본다/길고 미끈한 혀를 눈에 넣어/한 점 빛마저 빨아내버린다/나는 빳빳해져/펜처럼/어둠을 머금고 있다”(「먹물을 마신다」). 눈을 잎처럼 주렁주렁 단, 조은은 반양지(半陽地)식물. 누가 그의 예민한 동공에 쏟아 붓는, 쨍쨍한 삶의 고통을 순화시켜다오.

 -<시인세계> 2010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