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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주의자의 도데카포니



천문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조연호 (창비,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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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음악은 실제로 들리는 것 자체에 대한 의심을 만들어낸다.

-테오도르 아도르노, 「아르놀트 쇤베르크」

 

 조연호의 시를 찬찬히 읽고 있으면 어느새 우리의 관습어법이 처음 보는 이방의 관습어법과 함께 뒤섞인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낱낱의 단어만 새로워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새로움은 숙어 형태로, 이미 완성되어 있는 다른 문법의 형태로 틈입한다. 즉, 조연호의 시가 새롭다면 그것은 그의 시가 실험실에서 기존에 있는 생물들의 팔다리를 방금 막 이어 붙인 프랑켄슈타인이어서가 아니라 어딘가 다른 대륙에서 개별적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생태를 이미 갖추고 있는 곳에서 생물들은 가장 말초적인 신경까지 유기적으로 진화한다. 가령, 오리너구리처럼. 오리너구리는 ‘오리+너구리’가 아니라 자신이 충족해야 하는 목적에 완벽하게 조율된 유일무이한 신체 구조를 가진 나름대로 완벽한 개체다. 대체 그의 정신적 고립은 얼마나 지독했던 것일까. 그의 시들은 아주 오랫동안 개별적으로 생존해온 것이 틀림없다. 처음 그의 시를 대하는 사람들이 오리너구리 박제를 처음 대한 18세기 후반의 영국 자연과학자협회 회원처럼 당혹스러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연호의 시를 읽고 있으면 음악이 들린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 음악은 우리가 통상 서정시의 특성으로 이야기하는 말의 리듬감이나 운율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의 음악성은 오히려 추상적인 뉘앙스들로 만들어진 것 같다. 때로 그의 시구들이 한자처럼 환유적인 상형들을 조합하여 만들어진 것처럼 느껴질 때, 혹은 조성이 맞지 않는 여러 음들을 한꺼번에 연주하는 것처럼 여겨질 때, 나는 그가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시작을 ‘역연(逆緣)’의 시 쓰기라 했던 것을 기억한다. 이 말은 그가 비조성의atonal 음악을 작곡하고 있다는 뜻으로 들린다. 이 낯설고 아름다운 음악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서정시의 음악성’이라는 낯익은 개념을 거기에 적용하는 것이 왜 올바르지 않게 여겨지는가.


 그 자신이 자기 시에 “음사(音寫)된 세계” 같은 시구를 쓰고 있어서는 아니다. 그의 시작(詩作)은 다음 음표가 어디에 올지 예측할 수 없는 도데카포니dodecaphony 작품을 닮았다. 12음 기법의 작곡에서 각 음들이 그렇듯이, 그의 시 속에서 개별 낱말들은 모두 동등한 무게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음악은 반복적인 강약과 주요 동기를 돋보이게 함으로써 멜로디라인을 완성하는 전통적인 의미의 화음harmony을 부인한다. 케플러가 작곡한 별들의 음악은 협화음에 기초해 있었다. 우주의 협화음은 이 세계가 완전한 화합 속에서 신의 의지에 따라 합목적적으로 운행된다는 조화로운 세계관에 완벽하게 부응했다. ‘하느님의 발걸음은 협화음이시다’라는 것이 그 모토였다. 전통적인 시의 음악성은 그러한 전통적 세계관에 맞춤하여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약간의 변조(變調)는 익숙한 조성 속에서 조금 새로운 양념의 자극을 욕망하는 미식가의 만족을 위한 것이지, 주요 동기의 진행 자체를 방해해선 안되었다. 그러나 협화음에 기초한 세계관이 미심쩍어질수록 이 세계를 음사하는 악보에는 더 많은 음표와 더 많은 조성의 변화와 (작곡가, 연주가, 청중, 비평가 모두의) 더 복잡한 해석이 필요해진다. 아니, 거꾸로, 이 더 복잡한 세계를 표현할 시도로서 협화음의 예외들은 불가피해진다. 시집 서평에 웬 음악 이야기? 물론, 비유다. 그리고 언제나 전통적인 진리의 알몸은 ‘우주=협화음’이라는 식의 비유로 되어 있다. 바그너는 여러 목소리로 각기 다른 대사를 한꺼번에 여러 조성으로 소리치게 하고, 재즈는 신축성 있는 각 악기의 솔로를 통해 즉흥적인 자기 목소리를 개별적으로 발성하게 하며, 마침내 어느 시점에 이르러 비조성 음악은 이제까지 알려져 있던 조성들을 없수이여기면서 귀의 참을성을 시험하기 시작한다. 그래, 비조성 음악에도 박자는 있지만 그것은 지연되는 클라이맥스를 위해서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의 형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악보는 얼핏 고전적이지만, 음표들이 내는 소리는 유보성교(留保性交)와도 같은 긴장의 연속. 비평가들은 ‘쓰레기!’라며 모욕당한 것처럼 화를 내거나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찬사를 늘어놓고, 관객들은 이유를 모른 채 매료되거나 즉각적인 굴욕감을 느낀다. 오, 이것은 조연호 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가?

 
 이제 나는 그의 시가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진화해왔는가’를 설명할 차례이지만, 그것은 여전히 곤혹스러운 일이다. 진화는 어느날 돌연변이가 태어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오리너구리는 아주 오래된 동물이다. 태어난 이후 어두운 방에 있었던 기억밖에는 없다고 증언해 세간을 깜짝 놀래킨 카스파 하우저의 방에 고전들이 쌓여 있었다면, 그는 조연호의 시와 비슷한 것을 썼을지도 모른다. 가령, 이 시집의 서시 「고전주의자의 성」에서 ‘고전주의자’는 정형과 규율을 준수하고 형식의 완벽을 추구하며 최상의 예술을 추구한다는 예술사조상의 특질들과 더불어, 한자어 직역에 가까운, ‘고전(古典)에 탐닉하고 그것을 숭배하는 자’라는 의미로도 읽힌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구약성서와 변신에 관한 그리스 신화의 어휘는 그의 고답적인 취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율법과 삶이 일치해야 한다는 준엄한 명령을 살던 구약 시대의 삶은 이번 시집에서 끊임없이 그에게 영감을 주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아담의 세 번째 아들이었으며 실질적인 인류의 조상으로 간주되는 ‘셋’(아벨은 카인에게 살해당했고 카인은 살인자로서 방랑의 형벌을 받았으므로), 창세기에 잠깐 등장하여 요셉과 한 감옥에 갇혔던 ‘술 맡은 자’, 율법에 의해 금지된 바빌론의 음식을 거부했던 다니엘의 대사 “부정한 고기가 이 입으로 들어온 적이 없습니다” 등의 시어와 시구들은, 그 배후에 보이지 않는 준열한 신성의 목소리에 지배되던 고대 히브리적 삶의 단편들에 현대적인 해석을 가한다. 그가 고전주의자라면, 헬라인의 후예로서가 아니라 히브리인의 정신적 후예로서일 것 같다. 아니다, 그의 고전들은 그에게 어휘들을 제공해주지만, 세계관을 전수해주지는 않는다. 그의 시는 ‘조화로운 하느님의 발걸음’을 배반하는 12음 기법으로 작곡되니까. 율법과, 그의 시에 개진되는 율법에 대한 회의적이고 배반적인 해석은 금지와 위반의 동시적인 메커니즘을 짐작하게 해 준다. 그는 가족사를 비롯한 사적인 경험들을 이 같은 고전의 어휘들과 뒤섞고 있는데, 그것은 고전이 품은 가치들을 통해 사적 경험들을 재해석하고 재서술해서 ‘처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별적인 경험들을 고스란히 저장하여 온갖 뉘앙스들 속에서 숙성시키기 위해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어휘의 숨겨진 뜻들을 굳이 뒤지지 않더라도 그의 시는 아름답다. 가사를 모르고 들어도 아름다운 다른 나라의 노래처럼. 나는 이 시집의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연유했는지 낱낱이 밝히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오리너구리의 아름다운 생존을 오리의 부리와 물갈퀴와, 너구리의 몸으로 해부하지 않은 것을. 당분간 조연호 시의 아름다움은 그것을 오롯이 보여줄 설명의 패러다임을 추월해버렸다.

 -<시인세계> 2010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