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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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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와 총 와락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정끝별 (창비, 2008년) 상세보기 적들을 위한 서정시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허혜정 (문학세계사, 2008년) 상세보기 사라지지 않는 비행운 정끝별 신작 시집의 시들은 소리의 감각에 골몰한 농밀한 결과물들을 다수 품고 있다. 의미 중심의 산문 지향의 시들이 후반부에 여러 편 실려 있기도 하지만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말 자체의 리듬을 잘 살린 정통적 시형의 시들이다. 그런 시들은 바람을 품고 있는 홀씨처럼 행위의 계기들을 품고 있다. 그것은 어떤 가능성의 실체를 품고 있다고 서술되기보다는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인 가벼움의 동작성을 품고 있다고 서술되어야 마땅하리라. 해설에서도 언급되어 있듯이, 이 점은 표제작인 「와락」의 제목이자 시의 운을 이끌어가고 있는 ‘-..
절개면 앞에 선 나쁜 소년의 법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허연 (민음사, 2008년) 상세보기 ‘지옥에서 빗소리를 듣던’(「지옥에서 듣는 빗소리」, 불온한 검은 피) 한 남자가 “왠지 모르게 우리는 텔레비전처럼/행복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청량리 황혼」, 불온한 검은 피)는 마지막 전언을 남기고 사라진 지 13년, 홀연히 귀환한다. 두 권의 시집에 실려 있는 그의 얼굴 사진은 애인과 정사(情死)한 다자이 오사무처럼 불길하고, 불길한 얼굴이 으레 그렇듯 나이를 종잡을 수 없고, 좌우가 바뀌어 있다. 그는 방황하는 여름 같았던 청춘을 지나 회사원이 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시를 쓰지 않았다. 그는 병원에, 직장에 가는 일을 부끄러워했지만 목숨이 달려 있었으므로, 병원에 가고 출근을 했다. “왜 가난은 항상 천재이며..
'생명-폭력'과 그 숙주들 껌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김기택 (창비, 2009년) 상세보기 김기택(金基澤)의 시선은 이번 시집 『껌』(창비 2009)에서 더욱 집요해졌다. 그의 시선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독자로서는, 그가 눈 돌리지 않는 이상, 먼저 눈 돌릴 수 없다. 그의 시각적 집요함이 나의 시선을 끌고 들어갈 때, 평범하던 풍경이 별안간 투명한 살갗 안의 핏줄과 근육과 뼈로 화해 거꾸로 나를 응시하는 것을 느낀다. 대상은 평소의 모습을 벗고 뒤틀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대상이 지나치게 가까이 와 있다는 증거이리라. 이 만남은 일종의 폭력적 상황을 통해서만 성사된다. 실재는, 그 있음을 은폐할 때에만 우리에게 평온하고 상식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므로. 그로부터 불편한 진실들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이 진실들은 쉽사리 지..
키스는 왜 두 번 반복되어야 하는가 키스 지은이 강정 상세보기 첫 번째 키스-인류학의 탐침 위에 그려진 크로키 이 시집에는 두 편의 「키스」가 있다. 그리고 「키스」와 「키스」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다. 앞장과 뒷장 사이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키스는 잠시 쉬었다 계속된다. 우리는 ‘나’와 ‘너’가 어떻게 키스로 이어지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키스 이전에 얼마나 많은 말이 필요했는지도 알 도리가 없다. 어쨌든 키스는 혀로 할 수 있는 말 아닌 말의 첫 번째 형태다. 물론 그것은 말보다 수고스럽다. 그러나 그 수고는 기꺼운 수고다. 키스는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와 ‘그러고도 우리는 말할 수 있어요’라는 쌍방의 암묵적 합의가 이끌어낸 가장 가까운 상대와의 텔레파시의 시작이다. 그것은 착각과 오해로부터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위험천만하다. ..
처자를 거느린 디오게네스 화창 카테고리 시/에세이/기행 지은이 김영승 (세계사, 2008년) 상세보기 "무소유보다 더 찬란한 극빈"으로부터 7년 만이다. 7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독자인 우리로서는 시집을 통해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시 쓰는 것 말고는 별달리 하는 일이 없는 대한민국에 몇 안 되는 전업 시인 김영승은 지난 시집에서 “나만이 나의 노예”(「G7」)라는 ‘정신의 위대’와 “하긴/전당포에 외투를 맡긴/마르크스의 아내가 무슨 놈의 품위”(「가엾은 아내」)라던 ‘극빈의 위력’ 사이를 “매달려/늙어가는 호박은, 끌려가지는 않는다”(「매달려, 늙어간다」)는 긴장과 자긍심으로 생존해냈다. ‘생존해냈다’. 슬로터다이크의 말처럼 “사회적 삶은 안전한 은신처가 아니라 온갖 위험의 원천이다. 그렇게 되면 태연자약은 생존의 비밀..
풍자와 해탈 사이 차창룡, "고시원은 괜찮아요"(창비, 2008) 차창룡의 신작 시집 "고시원은 괜찮아요"는 풍자와 해탈 사이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라는 앞선 시인의 통찰은, 지금의 말로 좀더 적극적으로 해석해보자면 ‘정치적이거나 냉소적이거나’쯤 되지 않을까. ‘시’와 ‘풍자’라는 말이 일깨우는 예리한 힘은 뚜렷한 몇 가지의 선택지만을 우리에게 제시했던 가시적 폭압의 시절에 아주 잘 어울렸지만, ‘생정치적으로다가’ 우리 삶의 안과 밖을 한 땀 한 땀 오바로크하고 있는 지금-여기에서도 잘만 사용하면 훨씬 더 잘 어울릴 성싶다. 균열이란 균열은 죄다 시침질하고 마는 민활한 문화적 자본주의 세계의 은밀하고 화려한 색색의 실밥들이, 실은 누군가의 피와 땀이며 우리가 봉사세 명목으로 우리도 모르게 자진납세..
‘I scream'과 늑대-이것은 거짓말에 관한 이야기다 아이스크림과 늑대(랜덤시선29) 상세보기 이현승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 1996년 「전남일보」신춘문예, 2002년 「문예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이현승 첫 시집. 총 3부로 나누어 담은 이번 시집에서 끝을 알기에 약해지는 이가 아니라 그로써 그 끝의 다음으로 향하는, 무엇보다 머리가 아닌 손과 발이 분주하고 바쁜 시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극과 극은 원으로 하나 되기에, 시인은 삶이란 걸 무상으로 포장하는 듯 보이나 성실함, 매번 그 포장지를 새로 사들이고 정성들여 가위질한 뒤 리본을 서평) 이현승, (랜덤하우스, 2007) 이현승의 를 읽으면 누구나 ‘아이스크림’과 ‘늑대’에 관해, 시집에 만연한 ‘식사’와 ‘식탁’에 관해 이야기하게 된다. 그것은 “타자들의 소멸로 잠시 발광하는 생명의 식탁..
도덕적 현실주의라는 어려운 중용의 길 성스러운 테러 상세보기 테리 이글턴 지음 | 생각의나무 펴냄 서구 문명사를 아우르며 테러의 의미와 맥락을 추적하다 는 서구 문명사에 스며있는 테러의 계보학에 대한 고찰을 담은 책이다. 영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시즘 문학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신화와 프로이트, 니체와 서구의 다양한 문학작품들을 통해 서구 문명사에서의 테러를 고찰하면서 9ㆍ11에 대한 미국의 대응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테러가 단지 비이성적인 행동이 아님을 명시하면서, 인문학적으 서평) 테리 이글턴, 『성스러운 테러』(서정은 옮김, 생각의 나무, 2007)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가 자국에서 출간된 지 2년 만에 번역되었다. 9.11 이후 서구 사상가들은 테러의 충격과 그 후속적인 영향을 설명할 적절한 용어와 개념에 대해 골몰해왔으며,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