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46)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 병원에서 왼쪽 눈에 박힌 쇠붙이를 뽑아내면서 우리는 화법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겨울 다락방에서 사전을 뜯어 먹으면서 나는 로자 룩셈부르크 여사와의 관계를 청산했다 가끔 거울을 쳐다보면 내 검은 안대가 훈장처럼 떠올라 경이로운 화염이 혈관을 데우면서 우리들 4월을 되새기게 하지만 지금은 밤 늦도록 다락방에 모여 앉아 펼치는 늙은 학생들 문답강론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다 물론 하찮은 관형사 하나의 사용법을 놓고 갑론을박하는 좀스러움이 새벽길을 닦는 데 얼마나 탄탄한 자갈이 될지 알 수 없지만 참을성 있게 들어줄 수 있는 귀가 열리지 않는 한 4월은 정당하게 기록되지 않을 것이다 만년설을 부수며 전투적으로 일깨우는 새벽은 그 뜨거운 화염으로 근심하는 초목들이 불타고 우리는 검은 억새풀로 아침식탁을 마련해..
풍자와 해탈 사이 차창룡, "고시원은 괜찮아요"(창비, 2008) 차창룡의 신작 시집 "고시원은 괜찮아요"는 풍자와 해탈 사이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라는 앞선 시인의 통찰은, 지금의 말로 좀더 적극적으로 해석해보자면 ‘정치적이거나 냉소적이거나’쯤 되지 않을까. ‘시’와 ‘풍자’라는 말이 일깨우는 예리한 힘은 뚜렷한 몇 가지의 선택지만을 우리에게 제시했던 가시적 폭압의 시절에 아주 잘 어울렸지만, ‘생정치적으로다가’ 우리 삶의 안과 밖을 한 땀 한 땀 오바로크하고 있는 지금-여기에서도 잘만 사용하면 훨씬 더 잘 어울릴 성싶다. 균열이란 균열은 죄다 시침질하고 마는 민활한 문화적 자본주의 세계의 은밀하고 화려한 색색의 실밥들이, 실은 누군가의 피와 땀이며 우리가 봉사세 명목으로 우리도 모르게 자진납세..
교련 시간-이영주 교련 시간 이영주 네가 학교 옥상에서 미끄러지는 순간을 뭐라 불러야 할까 붕대를 둘둘 말고 교련 시간에는 아무도 모르는 사람을 구하는 법을 배운다 『이방인』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너는 딱 한 페이지만 읽었다 창가 맨 뒤에 앉아 창밖으로 흘러가는 구름의 귀퉁이를 칼날로 도려냈다 쌍둥이의 청바지는 언제나 고급스럽군 우리는 쉬는 시간마다 동생의 허리춤에 손을 넣고 웃었다 태양 때문에 누굴 죽이지는 않겠어 코를 킁킁거리던 쌍둥이는 한 군데서 달라진 자신들의 얼굴을 마주보고 침을 뱉었다 붕대를 감는 시간보다 푸는 시간이 더 빨랐던 너, 책상 밑으로 기어가 바닥에 이마를 쿵쿵 찧던 너는 『이방인』의 살인 이후 장면은 궁금하지 않았다 붉은 물을 들이마시며 담장의 나무들이 똑같은 표정으로 창문을 긁었다 시범을 보이려 ..
폐허의 섬 파르티타-이승원 폐허의 섬 파르티타 이승원 건물의 사체가 먼지를 머금고 아직 직립해 있을 때 썩지 않는 생선 꼬리를 맡으며 나는 누구의 이름을 생각해냈던가 인공물이 자연에 근접하며 낡아간다 지워지고 흔들리며 지붕은 속살이 드러나 그곳에선 빤히 혼자라는 게 허기처럼 떠오르고 태양계를 벗어나는 탐사선처럼 깊은 수심 속으로 내려가는 죽음을 상상한다 살마다 녹슨 새장은 스스로를 속박한다 들떠 일어난 천장의 페인트가 나방처럼 날개를 젓고 버려진 스패너들 검어진다 네 얼굴처럼 묽게 칠한 그의 아랫도리가 가리고 있는 두 개의 흐린 눈은 언제를 기억해내려 했던가 해가 흘린 피를 유리창이 반사한다 광택을 잃은 구층 아파트의 허물어지는 베란다 느리게 몸을 열고 거품을 무는 바다에서 새가 제 흰색을 공중에 그린다 짙은 물이 고인 거대한 욕..
‘I scream'과 늑대-이것은 거짓말에 관한 이야기다 아이스크림과 늑대(랜덤시선29) 상세보기 이현승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 1996년 「전남일보」신춘문예, 2002년 「문예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이현승 첫 시집. 총 3부로 나누어 담은 이번 시집에서 끝을 알기에 약해지는 이가 아니라 그로써 그 끝의 다음으로 향하는, 무엇보다 머리가 아닌 손과 발이 분주하고 바쁜 시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극과 극은 원으로 하나 되기에, 시인은 삶이란 걸 무상으로 포장하는 듯 보이나 성실함, 매번 그 포장지를 새로 사들이고 정성들여 가위질한 뒤 리본을 서평) 이현승, (랜덤하우스, 2007) 이현승의 를 읽으면 누구나 ‘아이스크림’과 ‘늑대’에 관해, 시집에 만연한 ‘식사’와 ‘식탁’에 관해 이야기하게 된다. 그것은 “타자들의 소멸로 잠시 발광하는 생명의 식탁..
동지에게 화답함 죽은 예언자의 거리 무엇이라 말할까 만남이라는 기막힌 우연과 그 섬뜩함에 대하여 마주치자마자 내 골수에 자기의 촉수를 담그는 얼굴들과 그 배경에 관하여 그 가지각색의 각개격파를 차별 없이 기적이라 부르는 순진한 이상주의에 대하여 그 상처 없는 잔혹한 천진난만에 대하여 어느날 두 사람이 만나 한 사람을 낳고 모두 사라지는 말할 수 없이 폭력적인 생리 어느날 두 사람이 만나 한 사람을 죽이고 손을 씻는 말할 수 없이 공공연한 심리 (어느 날 두 사람이 만나 세계가 비로소 시작되리라던 말할 수 없이 아스라한 예언) 이 거리의 이정표는 이제 아는 것들만 알려준다 이미 와 있는 것들의 끔찍한 소용돌이 (열린시학, 2007,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