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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희, "벡사시옹(Vexations)"

요즘우울하십니까(일반판)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김언희 (문학동네,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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벡사시옹(Vexations)


1
밥상 위의 파리가 엉겁결에 밥상 위의 파리가 되고 만 것처럼
金 역시 엉겁결에 金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엉겁결에

2
아무도 金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金은 숨었을 것이다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3
목을 맬 때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金이 물었을 것이다
별생각 없을 거야, 金이 대답했을 것이다

4
金이 입을 열자마자 金은 귀머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金이 귀를 기울이자마자 金은 벙어리가 되었을 것이다
金이 金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황홀경이었을 것이다

5
늘 웃을 곳이 아닌 데서 웃었을 것이다 金은 울 곳이 아닌 데서 울었을 것이다 金의 웃음은 어떤 울음으로도 울어지지 않는 울음이었을 것이다 金의 울음은 어떤 웃음으로도 웃어지지 않는 웃음이었을 것이다 늘 할 곳이 아닌 데서 했을 것이다 金은 늘 눌 곳이 아닌 데서 누었을 것이다 金조차 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金은 점점 더 웃기는 존재가 되어갔을 것이다 金은 金을 악물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악물어도 금방 벌어지곤 했을 것이다 헤벌쭉

6
金에게서 金이 꾸덕꾸덕 벗겨져 일어나기 시작했을 때, 金은 金의 끝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金을 金이, 金이 金을, 깎아 질렀을, 새파랗게 깎아 질렸을, 그곳에서 金은 서서히 金으로 메워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흉가의 아궁이처럼

7
사실 金은 金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한평생 金은 金의 뒤통수를 흘낏거렸을 것이다 자면서도 흘낏거렸을 것이다 金은 金에게 한평생 뒤통수만 보여주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8
심지어는 실종되거나 망각된 적도 없었기 때문에
金은 발견될 수도 기억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9
그럼에도, 金은 金과 하나였을 것이다 똥과 구린내처럼
그럼에도, 金은 金에게 말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金은 金을 볼 때마다 게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