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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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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주의자의 도데카포니  천문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조연호 (창비, 2010년) 상세보기 성숙한 음악은 실제로 들리는 것 자체에 대한 의심을 만들어낸다. -테오도르 아도르노, 「아르놀트 쇤베르크」 조연호의 시를 찬찬히 읽고 있으면 어느새 우리의 관습어법이 처음 보는 이방의 관습어법과 함께 뒤섞인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낱낱의 단어만 새로워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새로움은 숙어 형태로, 이미 완성되어 있는 다른 문법의 형태로 틈입한다. 즉, 조연호의 시가 새롭다면 그것은 그의 시가 실험실에서 기존에 있는 생물들의 팔다리를 방금 막 이어 붙인 프랑켄슈타인이어서가 아니라 어딘가 다른 대륙에서 개별적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생태를 이미 갖추고 있는 곳에서 생물들은 가장 말초적인 신경까지 유기적으..
저 거대한 눈이 쏘아 보내는 가시광선  생의빛살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조은 (문학과지성사, 2010년) 상세보기 ‘생의 빛살’이라는 제목은 얼핏 삶에 대한 긍정과 희망에 찬 주광성(走光性)의 노래들을 담고 있을 것 같지만, 이 시집의 시들은 민감한 동공을 가진 자의 통증에 관한 노래다. 그는 빛이 주는 고통을 감내하기 위해 종종 서늘한 그늘로 들어가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찌르는 듯한 이미지들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눈을 감아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얼핏 조은은 삶과 죽음, 빛과 어둠 같은 대립적인 언어들 사이에서 편향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이 대립항들은, 대개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돌면서 모순으로 가득 찬 삶에 동력을 부여하는 톱니바퀴들이다. 그렇지만 이 모순조화의..
소설가 곰치 씨의 분신(들) 소설을 쓰자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김언 (민음사, 2009년) 상세보기 30년쯤 전 김수영은 죽기 전에 쓴 그의 시론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지 시를 논하는 사람이 아니며,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그는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다”라고 쓰고선, 막상 시의 형식-예술성/내용-현실성 논의에 들어서자 “나는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쓰고 있다”고 쓴다.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쓴다는 것’에 부연하듯 덧붙인 말은 이것이다. “그만큼 많은 산문을 도입하고 있고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유가 없다.” 소설을 쓰듯 시를 쓴다는 말은 내용-현실성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알다시피, 그의 시론의 주제인 ‘온몸’은 형식과 내용이 분리되지 않..
기분의 유량통제시스템 우리들의 진화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이근화 (문학과지성사, 2009년) 상세보기 세상에는 자전거를 못 타는 기분도 있다 송곳니가 반짝이는 이상한 기분은 송곳니로 찌르는 이상한 기분으로 위로할 수 있지 -「송곳니」 2연 우리의 사회화된 감정은 대개 무엇에 울고 웃고 화내야 할지 상당 부분 교육된 결과다. 공생활 내에서 우리는 대충 어디서 어디까지가 우울이며 불안이며 공포며 명랑인지 비교적 선명한 스펙트럼을 갖는다. 그 안에서 울고 웃고 떨고 소리 지른다. 는 이 스펙트럼의 선명성 안에서 이해하기 힘들다. 수렴할 수 없는 미묘한 뉘앙스, 차이들에 시인은 사로잡힌다. 이름이 없으나 실재하는 ‘이상한 기분들’, 기분은 감정의 조짐처럼 다가온다. 12음계나 색상표를 들이대어보아도 이 이상한 기분에 딱 맞는 ..
삶=똥, 몰수당한 청춘의 알리바이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박후기 (창비, 2009년) 상세보기 박후기는 삶이 일종의 ‘덤’이나 짐이라는 부채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시에서 배설물이 등장할 때마다 그것이 생산의 지점과 동일한 장소를 의미하고 있다는 것은 아마도 그 징후일 것이다. 「채송화」에서 “무너진 집안의 막내인 나는/가난한 어머니가/소파수술비만 구했어도/이 세상에 없는 아이/.../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엄마는 아무 때나/울타리 밑에 쪼그리고 앉아/오줌을 누었다/죽은 동생들이/노란 오줌과 함께/쏟아져나왔다”라고 쓸 때 태어나지 않을 뻔 한 시적 화자의 느낌은 ‘죽은 동생들’과의 동일시 직전까지 가고, 「꽃 진 자리」에서는 “사과에겐/꽃 진 자리가 똥구멍이다/꽃 진 자리에 유난히/주..
고영, 오은 서평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고영 (문학세계사, 2009년) 상세보기 타자(他者)이며 타자(打者)인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중년 남자의 비애란, 그의 삶이 가족과 사회에 바쳐지고, 그 헌신을 위해 자기 자신의 사감(私感)들을 오롯이 감당하고, 평생의 노동이 그를 외면한 채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리라는 (확실한) 예감과 떨어뜨려 생각하기 힘들다. (「은자(隱者)」에서 그가 쓰고 있듯, 죽어서 비로소 은닉될 수 있었던 익명적 주체에게, 죽음과 대응항인 삶은 “자해의 흔적인지, 타살의 단서인지 도저히 밝힐 수가 없는” 노동의 흔적으로 치환된다.) 사랑이 많은 남자에게 이 비애는 유독 깊다. 사랑은 모든 국지적인 문제를 전면적인 번민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보편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유명한 영희에게서 투명한 앨리스에게로 앨리스네 집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황성희 (민음사, 2008년) 상세보기 세계는 완벽하다. 당위성이 빠지면 세계는 그 자체로 완벽해진다. 혹은 공유되(고 있다고 믿어지)는 당위를 수긍하고 난 뒤의 세계는 나름대로 완벽하다. 그런데 완벽이란 게 대체 뭐지? 그건 그냥 그대로 있음, 자연(自然) 아닌가? 유대인들의 신 ‘야훼’의 본래 뜻처럼, ‘스스로 그러한’ 것, 무수한 ‘-임’, Be 동사의 모든 주어들. ‘더 높은 곳’이 없는 이곳에서, 신성은 하향 평준화되고 만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어찌됐든 완벽하다. 그것은 ‘결국 모든 것은 좋은 것’이라는 실용주의의 명제가 세계화되는 자리, 과거의 모든 사건이 정당화되는 자리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돌이킬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야 한다’던 80년대 소..
몽유 소년의 씨에스타 후르츠 캔디 버스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박상수 (천년의시작, 2006년) 상세보기 유년, 평행 우주 다섯 명의 개구리 소년들이 유골로 발견되기 전, 때때로 나는 개구리 소년들이 자라지 않고 계속 산 속에서 개구리를 잡으러 다니는 꿈을 꾸곤 했다. 개울을 따라 산을 오르고 마침내 발견한 웅덩이에서 우무질의 개구리 알들과 막 깨어나기 시작하는 올챙이들을 발견하고 웅덩이 속에 발을 들여놓으면 손 안에서 개구리는 미끄러지고 왁자한 웃음소리, 첨벙거리는 물소리, 떠들썩한 아이들의 말소리들이 귓속을 파고들다가 곧 나 자신의 유년과 연결되는 꿈. 어릴 적 혼자 올라가곤 하던,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선 증산동 뒷산 중턱에서 어느 겨울날 오후에 발견한 삽 한 자루, 빨간 하이힐 한 짝, 손바닥만 한 개발자국들과 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