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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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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 없이 허연, 『내가 원하는 천사』(문학과지성사, 2012) 서평 도리 없이 정한아 첫 번째 시집 불온한 검은 피가 나왔을 때 그는 삶의 배경에 드리워진 죽음의 냄새를 쫓으며 실존철학을 읽고 있는 ‘젊은 시인’이었고, 13년 만에 두 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를 상자했을 때, 그는 삶을 위해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을 용서할 길 없어 밤에 마주친 도둑 고양이의 두 눈을 보며 추하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되새기고 있는 ‘범인(凡人)’이 되어 있었으되 하나의 ‘법’이 되고자 했다. 세 번째 시집은 이 ‘범인’의, 잃어버렸으나 사라지지 않는 기억의 지층을 계속 곱씹고 있다. 그의 첫 번째 장기는 후회다. “혼자 아프니까 서럽다”는 낡은 문자를 받고, 남은 술을 벌컥이다가 덜 자란 개들의 주검이 널려 있는 추적추적한 거..
이현승, <친애하는 사물들>(문학동네, 2012) 해설) 거기 수심이 얼마나 됩니까 이현승 시집 친애하는 사물들 해설 거기 수심이 얼마나 됩니까? 정한아 당신이 비로소 자발적으로 혼자일 때 당신에게 당신 한 사람만 탈 수 있는 잠수정이 주어진다면, 당신은 이것을 타고 어디까지 내려가고 싶을까? 실제로 돌고래 모양으로 생긴 레포츠 용도의 일인용 잠수정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은 잠수가 목적이 아니라 수면 바로 아래에서 달리거나 수면 위로 뛰어오르거나 뛰어올라 한 바퀴 돌기 위한 것이다. 잠수란 무릇 수면 아래로 깊이 깊이 침잠하는 일. 레포츠용 돌고래 잠수정이 유희를 위한 것이라면, 이현승의 일인용 잠수정은 명상과 사색으로 당신을 유도하여 당신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것들을 바라보도록 한다. 그러나 이 명상과 사색은 위안을 주어 당장의 양심을 편안하게 하거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 ..
허수경,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문학동네, 2011) 기차역에 서서 허수경 어쩌면 당신은 그날 기찻길에 놓여 있던 시체였는지도 어쩌면 달빛이 내려앉는 가을 어느 밤에 속으로만 붉은 입술을 벌리던 무화과였는지도 어쩌면 당신은 막 태어난 저 강아지처럼 추웠는지도 어쩌면 아직 어미의 자궁 안에 들어 있던 새끼를 꺼내어서 탕을 끓이던 손길이었는지도 지극하게 달에게 한 사발 냉수를 바치던 성전환자였는지도 어쩌면 이렇게 빗길을 달리고 달려서 고대왕국의 무너진 성벽을 보러 가던 문화시민이었는지도 당신은 나는 먼 바다 해안에 있는 젓갈 시장에 삭은 새우젓을 사러 갔던 젊은 부부였는지도 그 해안, 회를 뜨고 있던 환갑 넘은 남자의 지문 없는 손가락이었는지도 어쩌면 당신은 그날 그 여인숙이었는지도 세상 끝에는 여인숙이 있다는 거짓말에 속아 멀리멀리 끝까지 갔다가 결국 절벽에..
서평) 고등어 소년은 어떻게 리틀보이가 되었는가 조인호 시집, 방독면(문학동네, 2011) 아이는 무서웠다. 첫 번째 무서움은 어머니로부터. “만삭의 어머니가 생선을 굽던 비릿한 어느 저녁, 프라이팬 밖으로 튕겨오르던 기름방울처럼 지글지글 나는 태어났지 아기야, 생선을 먹어야지 머리가 좋아진단다! 어머니는 나무 도마에 흥건히 젖은 피를 닦으며 말하셨지 그날 이후로 나는 똑똑한 생선 한 마리”(「고등어 나르시시즘」). 고등어가 된 아이는 어머니와 유치원 선생님과 친구들과 첫사랑으로부터 조롱당하고 명령 받고 버림받고, “물 좋은 직장 하나 만나지 못하고 퀭한 생선 눈깔을 지닌 실업자”가 되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랩으로 포장된 고등어 한 마리로 태어나” “얘야, 어머니 같은 생선을 먹어야지 머리가 좋아진단다! 여전히 같은 말만 하”..
세계를 늘릴 것인가, '나'를 늘일 것인가 아메바(일반판)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최승호 (문학동네, 2011년) 상세보기 증식하는 유령들; 최승호, 아메바(문학동네, 2011) 등단 이후 꾸준히 독창적인 영역을 구축해온 최승호의 이번 시집은 자기 자신의 말들로부터 뻗어나간 실뿌리 같은 상상의 편린들을 그 원천들과 함께 수록하고 함께 읽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그가 인터뷰들에서 밝히고 있다시피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충분한 기획 의도를 가지고 수행된 것으로, 이번 시집의 출간이 시인 자신에게는 등단 이후 30여 년간의 자신의 詩作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로 여겨지고 있는 듯하다. 그는 이것을 ‘실험’이며 ‘일종의 문체연습’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연습은 ‘완성된 한 편의 시’라는 관념을 잠시 괄호 속에 넣고 ..
흑백의 밤 녹색의 불면증  아마도아프리카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이제니 (창비, 2010년) 상세보기 시인은 언제나 자신의 시가 너무 명백할까봐 걱정하고, 또 너무 모호할까봐 걱정한다. 어떻게 하면 잘 숨을 수 있을까. 그렇지만, 어떻게 하면 머리카락이 보이게 숨을 수 있을까. 어떤 시인들은 시가 재현하려는 대상의 전체가 지닌 뚜렷한 윤곽, 황금비율, 색채, 의미의 완전한 전달에 골몰하고, 또 어떤 시인들은 아직 드러난 적 없지만 (그래서 공상이나 망상으로 쉽게 오해받을 수도 있을) 세계에 편재하는 ‘무엇’의 손가락, 휙 돌아서 막 달아나며 사라진 실루엣에 불과한 뒷모습, 바람에 흔들린 옷깃 같은 단서들(만)을 독자에게 인색하게 제공한다. 이 기술들에 관해서라면 아마도 이제까지 제출된 모든 시론들을 다..
동지, 자네의 섬뜩한 농담은 내 손이 호주머니 속을 더듬게 해 그러니까, 우리가 장난이나 한번 쳐볼까, 하고 모였던 것은 지난겨울의 일이었다. 나는 거의 우연을 가장한 운명의 방식으로 (아니, 운명을 가장한 우연의 방식인가?) 그와 함께 동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동인 활동이란 건 대체 무엇인가? 한 30년 전쯤이라면 역사적이고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문학적인 대의명분이라도 있었겠지만, 시의 시대도 지나가고, 가시적인 적들의 적성(敵性)은 단물처럼 대기에 비가시적으로다가 녹아들고, 나름 교체된 정권도 한동안 살아보고, 지금은 상냥한 얼굴로 뒤통수를 쳐대는 교활한 적의 품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그래서 결론적으로 온갖 고민들이 문화적인 형태로 세련되고 교양 있는 취미의 자원을 이루게 된 지금, 21세기 시작하고 한 10년 지난 다음에 축구단이나 야구단도 아니고 동호회..
우리가 만일 아무짝에도 쓸모없대도  어깨위로떨어지는편지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이기인 (창비, 2010년) 상세보기 이기인 두 번째 시집의 주인공은 얼핏 농부, 비정규직 노동자, 노인, 공장 노동자, 노숙자로 나타나지만 실은 사물들, 도구적 사물들인 것 같다. 시인은 첫 시집에서는 인색했던, 경험 주체의 순하고 담백한 목소리로 신산한 삶을 고백하는 한편, 관찰자적인 묘사를 적극 활용하여 사물-주체/대상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존재론적인 시선을 심화시키고 있다. 가령, 시집에서 드물지만 매우 고백적인 시 「쌀자루」의 한 구절에서 “돈으로 환산이 불가능한 미발표 시의 제목을 바꾸는” 가난한 1인칭 시인 화자의 쓰디쓴 고백(“아이들 것은 그렇다 치고 저 잘난 나의 수저는 왜 이토록 입이 큰가”)에는 얼마간 수줍음이 서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