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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혁, 『이 집에서 슬픔은 안 된다』(민음사, 2013) 묵인 아직 젊었던 술집 여자의 등을 당신께 보냅니다 그 등에서 참았던 내 겨울도 보냅니다 나를 아들이라 부르던 손님들의 택시비와 이국땅에서 일요일마다 내게 주어지던 몇 푼의 돈도 함께 보내지요 나는 꼭 저금을 하는 기분입니다 당신이 남기고 간 기록들을 한 줄 한 줄 짚어 봅니다만 아마 실수로 빠진 내 이름이 오늘도 없습니다 요즘 당신은 통 편지를 보내지 않지요 어릴 적 공터에 뛰던 플라스틱 말들을 당신께 보냅니다 그 위에서 견디었던 내 예감도 보냅니다 먼 나라에서 한 번 당신을 본 적이 있지요 새벽이었고 당신은 내 가슴을 열고서 울기만 했습니다 결국 유사한 아침을 맞이하며 나는 사과나무 사이를 뛰어다녔습니다 종종 나무의 배후에서 당신을 봅니다만 그것은 비밀에 부칩니다 나는 말을 못 하는 일에 익숙하지요 ..
김성규,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창비, 2013) 절망 꽃들은 왜 하늘을 향해 피는가 그리고 왜 지상에서 죽어가는가 (80) 혈국(血國) 과일의 즙을 짜서 그릇에 담아보면 물체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다 인간의 피를 짜면 하나의 왕국이 세워지고 그 벽이 무너질 때 또 같은 양의 피를 흘린다고 한다 오늘, 조그만 도시를 통치하던 늙은 권력자가 죽었다 장례식이 축제의 도살장으로 변하고 사람들은 그가 누렸던 권력의 깊이만큼 접시를 펼쳐놓는다 상 위에 차려진 음식 냄새가 왕국을 가득 덮는다 냄새를 따라 곳곳에서 몰려드는 가난뱅이들을 보라 웃으며 게걸스레 접시를 비워대는 저들의 표정은 순간순간 음식 모양으로 바뀐다 마지막 남은 핏방울마저 혓바닥으로 핥아 먹으면 그들의 얼굴이 흰 접시 위에 올려져 잔칫상을 장식할 것이다 가난뱅이들의 표정을 젓가락으로 집어 먹으며 부..
박순원, 『그런데 그런데』(실천문학, 2013) 나는 한때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정자 하나 난자 하나였다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눈도 코도 없었다 나는 겨자씨보다도 작았고 뱀눈보다도 작았다 나는 왜 채송화가 되지 않고 굼벵이가 되지 않고 이런 엄청난 결과가 되었나 나는 한때 군인이었다 군가를 부르며 행진하고 총을 쏘고 일요일이면 축구를 했다 내가 쏜 총알은 모두 빗나갔지만 나는 한때 군인이었다 나는 지금 삼시 세 때 밥을 먹고 코를 골며 잠이 드는 사람이다 물고기도 다람쥐도 이끼도 곰팡이도 척척 살아가는 것 같은데 별일 없는 것 같은데 다들 좋은 한때를 보내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불안하고 왜 이렇게 후회가 되는가 겨자씨보다 뱀눈보다 작았던 내가 사람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었던 내가 이렇게 커다..
류인서, <신호대기>(문학과지성사, 2013) 위조화폐 지루한 휴전의 나날, 즐겨 입는 그물무늬 셔츠의 창살 안에서 나는 적들의 화폐 만들기에 열중입니다 내가 만든 이것으로 나는 다섯 개 강을 건너 사흘 동안 걸어가면 나온다는 적의 옛 마을이 숨은 지도를 살지도 모릅니다 벚나무 가지에 걸어둔 춤추는 노숙자 소녀의 분홍 전화기를 살지도 모르고 두툼한 샌드위치와 커피가 있는 휴일의 식욕과 다시 바꿀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오늘 사랑법 위조만을 위로 삼는 위험한 선택입니다 쇠비린내가 묻어나는 천진한 내 손은 나의 전리품입니다 식민지인 이 손안에서 팔랑이며 짤랑이며 몸을 섞는 악화와 양화들 보실래요? 곧 패총처럼 수북해지겠군요 동전처럼 뻣뻣하고 지전처럼 후줄근한 썩지 않는 그 나라가 코앞입니다 어리둥절 차가운 당신 웃음쯤 문제가 아닙니다 (10-11) 침묵 수..
괜찮다. 완전히 불순한 이유로 들추어본 몇 개의 계간지에서 보석 같은 시들을 보았고, 그것으로 괜찮다. 그 불순한 이유는 충족시키지 못했지만, 괜찮은 시 평론가가 별로 많지 않은 것은 별로 불행하지 않은 일이다. 괜찮은 시인들이 있다면, 그것으로 희망이 있다. 괜찮은 독자들이 별로 많지 않은 것은 훨씬 불행한 일이지만, 그건 괜찮은 시 평론가가 별로 많지 않은 이유와 직결되고 있는 것이고, 괜찮은 시인들이 있다면 괜찮은 독자는 언제든 태어날 수 있다. 그러면 괜찮은 평론가는 시간 문제다. 그들은 돌 속의 형상처럼 잠재되어 있다. 다만 가장 불행한 것은 정신성의 힘을 믿지 않는 제도가 참 오래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고, 이들이 돌 속에서 잠자고 있는 형상 따위는 상상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하루를 꼬박 산..
이우성, 『나는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 왔어』(문학과지성사, 2012) 가벼운 공간 가장 가까운 벼랑과 손 떨어지는 손은 손을 잡고 잡은 손은 다짐의 일부처럼 깊이, 흐른다 나는 거의 오래되었지만 조용히 벽으로 이루어졌다 듣지 못한 소리는 태어나지 않은 부분에 관한 것 내미는 손을 자꾸 삼키며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바다는 와 있고 두드린다 두드린다 풍선과 나와 표정과 방 손을 잡고 손을 잡고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면 거기 내 비밀이 걸려 있고 흙에서 살냄새가 나겠지 (50) 이우성 금요일 밤인데 외롭지가 않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온다 집에 있는 게 부끄러울 때도 있다 줄넘기를 하러 갈까 바닥으로 떨어진 몸을 다시 띄우는 순간엔 왠지 더 잘생겨지는 것 같다 얼굴은 이만하면 됐지만 어제는 애인이 떠났다 나는 원래 애인이 별로 안 좋았는데 싫은 티는 안 냈다 애인이 없으면 잘못 사..
김재훈, "웅크린 사람" 웅크린 사람 김재훈 울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화분 하나 어둠 속에서 꺼낸 뒤 다른 어둠 쪽으로 옮겨 놓고는 암시도 없이 전략도 없이 울고 있다면 울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 2012년 1월
황인찬, "의자" 의자 황인찬 여섯 살 난 하은이의 인형을 빼앗아 놀았다 병원놀이를 하기 위해서였다 인형은 나의 의사선생님이었다 나는 선생님께 아프다고 말했다 어디가 아프냐 물어도 아프다고만 선생님은 내게 의자에 앉으라 하셨다 의자는 생각하는 의자였다 앉아서 생각해보라고, 잘 생각해보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실 때, 나는 울어버렸다 무서워서 너무 무서워져서 - 2011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