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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의 윤리와 캠페인의 모럴-'시와 정치' 논쟁에 부치는 프래그머틱한 부기 동경백색집단 어느 날 저녁, 평소와 같이 저녁을 먹고 TV를 켜자 다음과 같은 뉴스가 흘러나왔다. ● 앵커: 요즘 일본은 온몸을 흰 천으로 감싸고 유랑생활을 하는 백색집단 때문에 시끄럽습니다.종말론을 내세우며 집단생활을 하는 백색집단이 자칫 큰 사고를 내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합니다.도쿄 김동섭 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기자: 이 백색집단은 자신들의 몸은 물론이고 이동용 차량까지 온통 흰 천으로 감싼 특이한 외향으로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흰색이 전자파를 차단한다는 희한한 논리를 내세우고 있는 이들은 전자파가 적은 곳을 찾아다닌다며 산간지방 도로를 점거한 채 집단생활을 계속해 현지 주민들과 마찰을 빚다 결국 본거지로 돌아갔습니다.● 일본 야마나시현 주민: 일단 기분 나쁘고 관광에도 영향이 있다.● 기..
엘비스의 찹쌀 도나쓰 * 이 모든 것은 팩트이며 전혀 허구가 아니다. 1982년 봄, 엄마와 아빠와 나, 세 식구가 구반포 아파트에 셋방을 들어 살 때였다. 프로야구가 막 창단되고 MBC 역사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에서 엄마를 닮은 이미숙이 여우 짓을 하면서 강석우 손가락을 물던 시절이다. 어린 엄마는 나를 데리고 밖에 나갈 때면 이모라고 부르라 했다. - 왜? - 재밌잖아. 내가 이모, 이모, 부르면 시장 아줌마들이 어머, 조카가 귀엽네요, 하면서 사심 없이 뺨을 꼬집어주었다. 그래서 엄마는 상가에 가면 이국적인 물건들이 잔뜩 쌓인 수입품점 구경하기를 즐기는 발랄한 이모가 되었다. 기분이 좋아진 이모는 길 건너 에서 소보루나 팥빵을, 그보다 기분이 더 좋으면 찹쌀 도나쓰를 사주었다. 겉은 바삭하고 씹으면 쫀득쫀득한 찹쌀 ..
2011 아시아 시 페스티벌 발제문) 아시아는 어디에 있는가 인류는 이제 단일재배를 개시하려 하고 있다. 인류는 마치 사탕무를 재배해내듯 문명을 대량생산해낼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 인류의 식탁에는 오직 그 요리뿐이리라.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힘의 탐구」, 슬픈 열대 아시아 시 교류 심포지움의 발제문을 청탁받은 후 저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아시아가 어디에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화적인 권역 개념으로 생각하자니, 중동 아시아와 서남 아시아, 중앙 아시아, 동남 아시아, 동북 아시아 사이의 문화적인 차이는 건너뛸 수 없을 만큼 넓은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대륙 개념으로 생각하자니 유럽과 아시아가 어디에서 나누어지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아시아’라는 말은 대충 ‘비(非)서구’를 가리키는 말이 ..
무(無)의 두드러기에 대한 명상 처음 시를 썼던 때를 나는 결코 잊지 못한다. 그것은 1987년 6월의 어느 날이었고, 학교에서 돌아와 아무도 없는 집에서 작은 치자 화분에 깔린 이끼 위를 기어다니던 민달팽이를 꼼짝없이 한 시간쯤 들여다본 후였다.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이 단순한 생물은 그토록 느린 속도로 젖은 이끼 위를 돌아다니며 화분을 빠져나갈 생각 같은 것은 하고 있지 않았다. 집이 없구나, 너도. 이렇게 혼자인데 말이지. 연무가 깔린 뿌연 대기는 온화하고, 오후 네 시의 햇빛은 알맞게 익어 평온이랄지 나른함이랄지 느리게 유동하는 어떤 집중된 정서가 나를 일종의 명상 상태로 몰아넣었다. 어린아이들이 종종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이때를 생각한다. 그럴 때 아이들은 온몸으로 명상 중이다. 살갗에 열려 있는 ..
저 가늘게 뜬 눈의 황홀 잘 익은 살구 알처럼 눈높이에 떠 있었던 저물녘의 태양은, 터뜨리면 흘러나올 듯한 무게감을 늘어뜨리며 천천히 마천루 뒤로 사라져갔다. 그 광경을 함께 보면서,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석양을 본 지 만 33년 하고도 절반을 지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내 눈꺼풀 속에서 보고 있는 이것은, 2년 하고도 절반이 지난, 마지막 석양의 꿈. 오래된 어제의 석양이지만, 어제의 석양도, 내일의 석양도, 내게는 매양 오늘의 석양만 같다. 해가 나지 않는 흐린 날이나 지난여름처럼 내내 비가 퍼붓던 계절에도, 어제의 석양이나, 내일의 석양이나, 내게는 매양 오늘의 석양만 같아서, 두 눈 속 저녁의 노을빛은 어떤 떠남을 암시한다. 떠남의 가장 떠남다운, 모든 떠남의 궁극적인 떠남을. 처음 석양..
유토피아에서 아나키로 기획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시인에게 시 쓰기 자체가 실천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개성이 다양한 만큼 실천의 모습 또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번 기획 특집에서 이 다양한 시 쓰기로서의 실천이 시에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왜 그렇게 다양하게 나타나는지를 여러 평론가와 시인의 시각을 통해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아마도 이 기획의도에 대한 나의 해석이 이 글의 성격을 규정지을 것이었다. 1. ‘실천’은 무슨 뜻인가? 2. 1.의 의미와 관련하여 ‘다양한 시 쓰기로서의 실천’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 2의 ‘다양한 시 쓰기로서의 실천’이 성립 가능한 구문이라면, 그것이 ‘시에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밝히는 것은 가능한가? ‘왜 그렇게 다양하게 나타나는지’라는 의문은 타당한..
서평) 고등어 소년은 어떻게 리틀보이가 되었는가 조인호 시집, 방독면(문학동네, 2011) 아이는 무서웠다. 첫 번째 무서움은 어머니로부터. “만삭의 어머니가 생선을 굽던 비릿한 어느 저녁, 프라이팬 밖으로 튕겨오르던 기름방울처럼 지글지글 나는 태어났지 아기야, 생선을 먹어야지 머리가 좋아진단다! 어머니는 나무 도마에 흥건히 젖은 피를 닦으며 말하셨지 그날 이후로 나는 똑똑한 생선 한 마리”(「고등어 나르시시즘」). 고등어가 된 아이는 어머니와 유치원 선생님과 친구들과 첫사랑으로부터 조롱당하고 명령 받고 버림받고, “물 좋은 직장 하나 만나지 못하고 퀭한 생선 눈깔을 지닌 실업자”가 되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랩으로 포장된 고등어 한 마리로 태어나” “얘야, 어머니 같은 생선을 먹어야지 머리가 좋아진단다! 여전히 같은 말만 하”..
세계를 늘릴 것인가, '나'를 늘일 것인가 아메바(일반판)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최승호 (문학동네, 2011년) 상세보기 증식하는 유령들; 최승호, 아메바(문학동네, 2011) 등단 이후 꾸준히 독창적인 영역을 구축해온 최승호의 이번 시집은 자기 자신의 말들로부터 뻗어나간 실뿌리 같은 상상의 편린들을 그 원천들과 함께 수록하고 함께 읽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그가 인터뷰들에서 밝히고 있다시피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충분한 기획 의도를 가지고 수행된 것으로, 이번 시집의 출간이 시인 자신에게는 등단 이후 30여 년간의 자신의 詩作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로 여겨지고 있는 듯하다. 그는 이것을 ‘실험’이며 ‘일종의 문체연습’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연습은 ‘완성된 한 편의 시’라는 관념을 잠시 괄호 속에 넣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