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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인간이 되는 것만도: 알베르 카뮈,『페스트』 * 참고한 판본은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페스트』(책세상, 1992(1947))이다. “그런데, 타루.” 그가 말했다. “뭣 때문에 이런 일에 발벗고 나서지요?” “나도 모르죠. 아마 나의 윤리관 때문인가봐요.” “어떤 윤리관이지요?”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초년에 『이방인』을 발표하면서 문단의 유망주로 관심을 한 몸에 받던 알베르 카뮈는 흔히 장 폴 사르트르와 함께 대표적인 실존주의 작가로 불리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 자신을 포함한 세상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방인』의 심드렁한 주인공 뫼르소는 세계에서 자기 존재의 근거와, 욕망과 동경과 활기를 잃어버린, 오직 우연한 세계에서 방황하고 있는 방랑자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19세기 내내 유럽은 신이 죽어버렸거나, 혹 존재한다손..
어떡하지, 나는 작가선언보다 백수선언이 어울릴 것 같은데 어떡하지, 나는 작가선언보다 백수선언이 어울릴 것 같은데 - 6.9 작가선언이 나에게 가져다준 것 정말이지, 나는 이 원고의 청탁을 왜 덥석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 처음 6.9 작가선언에 대한 짧은 에세이를 부탁한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잠시 망설이다가 쓰기로 한 것은 어떤 부채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며칠 지나면서 점점 확실해지는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하고 나는 사실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후회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대학로에서 첫 모임을 가졌을 때 참석하기는 했었다. 처음에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누구였더라? 아무튼 노무현 대통령이 강압적인 검찰 수사 끝에 투신하고 며칠 뒤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고, 우선 모이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는 전화를 받았다. 두 민주계 대통령의 집권 10년을 거치면..
일어권 독자를 만나는 마음 오래 전 캐나다에서의 일입니다. 유키와 저는 짧은 영어로 대화하면서 친구가 되었습니다. 저는 일본어를, 유키는 한국어를 못했지요. 영어 학교의 짧은 학기가 끝나고 그녀는 미국으로 가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횡단여행을 떠났습니다. 가는 도시마다 그곳 엽서를 저에게 보내주었는데 워싱턴 시에서 보낸 엽서에는 빌과 힐러리 클린턴 부부의 사진에 “Buy 1 & Get 1 Free!”라는 재미있는 문구가 쓰여 있었어요. 그녀는 계속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답장을 쓸 수 없었습니다. 저는 가끔 시가, 우리 사이에 오가던 비문투성이 영어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네, 그것은 문법이 엉망이지만 거의 텔레파시에 가까웠을 거예요. 우리가 설령 서로의 말을 오해하고 있었다고 해도요. 오래 전 엽서들에 뒤늦게 답장하는 ..
동경외대 번역 워크샵 강연문 초청해주신 정기인 선생님과 제 시집을 선택하고 읽어주신 동경외대 조선어학과 학생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질문을 전해 받고 생각한 바를 적어보았습니다. 1. 시, 시인, 시 쓰기, 시와 사회 최초로 쓴 시가 어떤 시인지, 그 시를 쓰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어릴 적 장래희망은 사립탐정이었습니다. 여덟 살 때 모리스 르블랑의 을 읽은 후부터였지요. 저는 늘 비밀에 관심이 많았고, 수수께끼에 매료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사립탐정이라는 직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몹시 실망했습니다. 열한 살 때 처음 숙제로 시를 썼습니다만, 그것은 학교에서 배운 ‘시라고 생각되는 것’을 의식하고 쓴 것이었을 따름입니다. 자발적인 내적 욕망으로 처음 시를 썼던 것은 열두 살 무렵이었습니다. 사춘기가 막 시..
매다 꽂기 첫 시집을 냈을 때 내가 전해들은 내 시에 대한 한 선배 시인의 반응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정한아 시는 이름을 가리고 읽으면 마치 남자 시인의 시를 읽는 것 같아. 남자 시인과 여자 시인의 시가 따로 있다는 말인가? 나는 크게 놀랐지만 가벼운 자리였기 때문에 그저 농담을 하는 것으로 화제를 전환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 마음속에 아저씨가 한 명 살고 있나 봐요. 심각하게 이야기하면 내 마음속에 살고 있는 그 아저씨는 이제까지 내가 사랑하며 읽어온 고전들의 저자가 주로 백인 중년 남성들이었다는 점에서 비롯될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좋아했던 이나 같은 고전적인 복수극도, 셜록 홈즈 시리즈나 같은 추리소설도, 10대 시절에 푹 빠져 지냈던 실존주의 작품이나 누보 로망도 대부분 백인 아저씨들이 쓴 것이었다..
그가 아직 평론가가 아니었을 때 아, 이런 글을 내게 맡기다니 반칙이다. 시인의 커버스토리라면 시를 인용할 수 있었겠지. 시를 인용한다면 10-20매는 그냥 넘어간다. 하지만 평론가의 커버스토리라니. 게다가 강석이 형은 너무 친한 선배라 어디까지 써도 좋을지 감도 오지 않는다. 형의 책들을 죄다 읽어볼까, 하다가 며칠이 가고, 형의 논문들을 읽어볼까, 하다가 또 며칠이 가고, 원고청탁서에 쓰인 대로 어린 시절과 문청시절을 취재해볼까, 하다가 며칠이 가고, 그렇게 마감일을 두 번이나 넘기고서야 빈문서 앞에 앉는다. 아무래도 나는 평론가 조강석에 관해서는 쓸 자신이 없는 것 같다. 연구자 조강석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벌써 오랜 시간 평론과 논문에서 이미지론을 심화해온 터라 그 내용을 어설프게 해설해봤자 그의 평론 한 편을 지긋이 읽..
奇亨度.◨奇形圖. 그것은 아무래도 추상어일 것이다. 짧은 생애를 가졌던 어떤 정신과 감각의 덩어리를 추상화하여 명사로 만든 것. 그것은 아무래도 예술사의 어느 시점에 새로 생긴 어떤 사조를 이르는 말일 것이다. 그 사조에 스스로 속했다고 생각한 내성적인 사람들은 오랜 우울로 인한 무감각을 묘사하기 위해 주로 겨울날을 흑백의 배경 속에서 다루었으며 채도보다는 명암을 통해 음화를 그렸다. 따라서, 의도치 않게 대담한 그림을 생산해내는 경우가 있었다. 도시의 암울한 고독과 아직 중간관리자가 되지 못한 젊은 사무노동자의 실존적 불안, 가로수처럼 도시에 아주 약간 남은 자연물들의 위압적이거나 계시적인 침묵과, 주기가 긴 변용 속에서 불길한 징조를 자주 발견했으며, 오래 전에 자기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죽은 자신을 애도하..
벌레의 눈과 새의 눈 16세에 학교를 뛰쳐나와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대영박물관에서 다방면에 걸친 독서를 통해 독특한 사상을 펼친 콜린 윌슨은 제도화된 학문분과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이른바 ‘B급 관심사’들을 진지한 학문적 주제와 더불어 고찰하기로 유명한 작가이다. 그는 인류의 범죄사를 서술한 『잔혹』이라는 책에서 줄리언 제인스의 ‘분리 뇌’에 관해 논하고 있다. 내용은 이렇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현생 인류의 대뇌는 우반구와 좌반구로 분리되어 있으며 그 사이를 두툼한 뇌량이 연결하고 있다. 좌뇌는 언어와 논리적 사고를, 우뇌는 직감과 패턴의 인식을 담당한다. 간단히 말해 좌뇌는 과학자, 우뇌는 예술가이다. 문자가 발명되기 전의 오래된 우리의 선조는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뇌량이 지극히 작거나 없어서 두 개의 뇌가 동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