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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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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 시집, <백치의 산수>, 민음사, 2016 백치의 산수 현관에 놓인 신발들을 보니 이 집에 없는 사람이 살고 있구나괜히 문밖으로 나가 노크를 한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문을 열고 들어와 신발을 벗고 신발 개수를 확인한다검은색과 푸른색 신발이 있고흰 신발이 하나 구겨져 있다 흰 신을 신고 잠깐 나갔다가돌아오자마자 검은 신발로 갈아 신는다 흰 신을 신은 자는 밖에 있는데, 흰 신이 말하려다 턱이 빠진 사람처럼나를 올려다본다 푸른색 신발 위엔 지난봄의 나비가 어른거린다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오니 더 먼 곳으로 나와 버린 기분이다문 쪽으로 귀를 기울인다 선회하는 나비의 기침소리 공책을 펼쳐 어제 하려 했던 말을 적어 본다아무 말도 써지지 않는다검은 신이 뚜벅뚜벅 방으로 들어온다 허리를 구부려 신발을 신는다 굴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거나물속에서 기어나..
출국장에서: 작란(作亂) 트리뷰트 도깨비장난 (...)작란(作亂)이라는 동인에 가담해서 장난을 치고 다닌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건 적법한 행위입니다. 왜 헌법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까,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고. 지금 장난하자는 겁니까? 작란은 예전부터 이미 하고 있습니다. 그 장난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없었습니까? 다 제 부덕의 소치입니다. 주변 사람들을 잘 돌보겠습니다. 장난에도 수위가 있는 걸 모르십니까? 소꿉장난, 흙장난, 불장난, 도깨비장난…… 도깨비장난이 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밑줄을 그을 단어가 나온 것 같습니다.(...) -오은, 「청문회」(『유에서 유』, 문학과지성사, 2016) 작란 말고는 동인을 모른다. 물론 문학사 책에 나오는 동인들과 동시대를 사는 다른 동인들이 있다는 사실, 그들의 이름, 그들에 속한 다른..
사후의 사후를 사는 냉담자의 멜랑콜리, 혹은 신성성의 재상상: 송승언의 시 돌의 감정 오래 전에 어떤 철학자의 윤리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문득, ‘나는 돌이 될 수도 있었다’는 상상이야말로 가능한 상상과 불가능한 상상의 접점에 서는 첫 경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 철학자는 근대 초기에 살았던 사람으로, 아직 매일 햇볕을 받으며 물속에 잠긴 돌 위를 흐르는 물을 보면서 강변을 산책하는 일에 익숙했고, 콘스탄틴주의와 유대교의 강력한 신 개념과 그 이름을 통한 현실적 지배 속에서 살았지만, 이상하게도 경전의 글자들에 얽매여 있지 않았던 듯 보이는 데다, 바로 그런 이유로 자기 민족 집단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자기의 국가 종교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그런데도 더욱 더 이상한 것은, 그가 지극히 종교적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그는 범신론적이고도 유물론적으로 자연과 우리의 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