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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월간 시사사, 통권 84, 2016년 9-10월호 내 인생의 책 이장욱 그것은 내 인생이 적혀 있는 책이었다. 어디서 구입했는지누가 선물했는지꿈속의 우체통에서 꺼냈는지 나는 내일의 내가 이미 씌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따라살아갔다.일을 했다.드디어 외로워져서 밤마다 색인을 했다. 모든 명사들을 동사들을 부사들을 차례로 건너가서늙어버린 당신을 만나고오래되고 난해한 문장에 대해 긴 이야기를 우리가 이것들을 해독하지 못하는 이유는 영영눈이 내리고 있기 때문너무 많은 글자가 허공에 겹쳐 있기 때문 당신이 뜻하는 바가 무한히 늘어나는 것을 지옥이라고 불렀다. 수만 명이 겹쳐 써서 새까만 표지 같은 것을 당신이라고당신의 표정당신의 농담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이상한 꿈을 지나서 페이지를 열 때마다 닫히는 것이 있었다. 어떤 문장에서도 꺼내어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
모순에 대한 중단 없는 사랑을 위하여 나는 오랫동안 하이데거와 첼란을 둘러싼 몇 개의 장면들을 하나의 유비로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 내가 이 일화들에 흥미를 느낀 것은 제도적 절차를 통해 ‘시인’이나 ‘평론가’가 되기 전이었다. 그때 나는 하이데거와 첼란을, 시를 사랑하는 사람과 시를 쓰는 사람, 아름다움에 빠진 사람과 아름다운 사람, 이를테면 나보코프의 험버트 험버트와 롤리타, 혹은 토마스 만의 구스타프 아셴바흐와 폴란드 소년의 관계와 같이 생각했다. 롤리타는, 폴란드 소년은, 험버트와 아셴바흐를 얼마나 절망에 빠뜨렸나! 하이데거는 횔덜린과 릴케와 첼란을 읽을 때마다 자신이 시인이 아니라는 사실, 단지 시를 사랑할 뿐이라는 확인에 얼마나 비참했나! 얼마나 시인이 되고 싶었나! 시가 ‘명명하는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철학사 전체를 자신..
어떤 무한 변주 중인 후렴구 *그때, 우리가 앉아있었던 그 광장의 이름을 기억할 수 없다. 아니, 우리는 처음부터 그 광장의 이름을 알았던 적이 없다. 그러나 그날, 우리가 파리에서 열차를 타고 아비뇽에 도착해서 차를 빌리고 처음 야외 식탁에 앉아 파란 하늘 아래 노란 햇빛 속에서 양고기 꾸스꾸스를 먹었던 날, 우리는 우리가 떠나온 곳에서 여객선이 침몰하고, 수학여행을 떠났던 소년 소녀들이 물속으로 영원히 여행을 떠났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비뇽에서, 파란 하늘 아래 노란 햇빛 속에서, 끊어진 아비뇽 다리 위에서, 끊어진 아비뇽 다리의 절단면 앞에서 하염없이 강물을, 하늘보다 더 파란 강물을 바라보고 있던 비둘기며, 떠내려가다가 다리 기둥에 걸려 반쯤 잠겨 있던 커다란 나뭇가지, 하늘보다 더 파란 강물 위에 검푸른 그림자를 드..
나이든 여자들 주민센터에 요가 다니면서 같은 방향으로 귀가하는 아주머니들 사이의 대화. (우리 아파트 옆 동 아주머니와 단둘이 되기 전까지 나는 맨 뒤에서 따라가며 엿듣기만 한다.) 1.“난 쟁기자세가 안 돼. 애기집을 들어내서 그런가, 힘이 안 들어가.”“형님, 그건 애기집 없어서 안 되는 거 아녜요. 전 30대 초반에 들어냈는걸요.(그래도 잘 하잖아요.)” 2.“저번에 친구가 길 가다 넘어졌는데 복숭아뼈가 으스러졌지 뭐야.”“젊어 술 좋아한 친구들은 고관절에 죄 철심 박고 있더라고요.” 옆 동 아주머니가 어제는 요즘엔 동해에서도 홍어가 잡히더란 이야기를 해주었다.
계간 <문학선> 2016년 여름호 기억해둘 만한 글* 서용순, 「사건의 윤곽과 문학의 연루에 대하여」 까마귀 연합 김혜순 한국까마귀와 일본까마귀 중국까마귀세 마리가 8.15에 신칸센을 타고 가면서 도시락을 먹고 있는데 까마귀 두 마리의 조그맣고 빨간 고무 인형 손처럼한국 까마귀의 손도 빨갛게 작은데 추하게 생긴 눈썹이 탱크 같은 트렁크를 몰고 옵니다 갉작갉작 시계는 내 가슴에서 흐르고갉작갉작 전분은 내 대뇌에서 흐르고 까마귀 세 마리가 서로 서로를 엄마아빠로 착각하고 있는데피 범벅된 아기 까마귀를 감자로 착각하고 있는데 돌림노래를 부르러 가고 있는데 뇌 깊은 곳 환희 바이러스가 폭발하고 있는데까마귀의 이빨들이 은빛 펜촉으로 변하고 있는데 당당한 까마귀들의 영혼이일본의 하늘에 쇠붙이 같은 글씨를 쓰고 있는데환시 환청 환취 환미 환각이렇게 ..
Read Mr. Sacher-Masoch 썅. 진짜 너무 덥다. 동양도서관이 쉬는 월요일이어서 가끔 오던 서운작은도서관에 왔는데, 이 도서관에서 매일 밥 얻어먹는 노랑 고양이도 너무 더워서 도서관 현관 층계참 그늘에서 늘어진 채 죽은 듯이 잠을 자고 있다. 진즉에 끝냈어야 할 들뢰즈 원고가 시원하게 나오질 않고 찔끔찔금 염소똥처럼 떠듬떠듬 씌어지고 있어서 논문 후유증으로 '고장난 글 센서'가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있는 동시에, 그럼 일주일 후에 마감인 학술대회 발표문은? 머리가 띵하다. 그러나 소득이 없지는 않았다. David Sigler라는 사람이 쓴 논문 하나를 읽었는데, 굉장했다. 이라는 글인데, 들뢰즈의 마조히즘에 대한 글들이 대개 프로이트의 사도-마조히즘과의 구별점(이미 들뢰즈 그 자신이 충분히 논하고 있어서 ..
'역장'이 은유가 아님 은유는 우리들 사상의 신화적 유물론의 증거임. aka 에반게리온의 통찰. 허핑턴포스트코리아: 과학자들이 우리의 몸을 감싼 '포스 필드'를 발견했고, 당신은 그걸 느낄 수도 있다.
들뢰즈 7월 18일의 일기. 들뢰즈의 유작인 비평과 진단을 읽고 있다. 본래는 들뢰즈와 문학에 관한 글의 집필을 시작해야만 했지만.이 책의 번역에 비문이나 오탈자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 것은 사실이지만, 매저키즘 같은 예외를 제외하고는 들뢰즈의 책 거의 전부가 이렇게 독해에 저항한다. (매저키즘이 영어 중역이라서일까? 그러니까, 그의 불어 텍스트 자체가 번역하기 어려운 것일까?) 이 책의 앞머리에 붙은 췌사는 심지어, 프루스트의 反 생트-뵈브(Contre Sainte-Beuve)라는 책에서 인용한 다음의 문구이다; "훌륭한 책들은 일종의 외국어로 씌어져 있다." 자신의 책이 잘 읽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지한 상태에서 붙여놓는 이런 췌사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의 책이 읽히지 않는다고 당신은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