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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시인론

몽유 소년의 씨에스타


후르츠 캔디 버스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박상수 (천년의시작,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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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평행 우주

다섯 명의 개구리 소년들이 유골로 발견되기 전, 때때로 나는 개구리 소년들이 자라지 않고 계속 산 속에서 개구리를 잡으러 다니는 꿈을 꾸곤 했다. 개울을 따라 산을 오르고 마침내 발견한 웅덩이에서 우무질의 개구리 알들과 막 깨어나기 시작하는 올챙이들을 발견하고 웅덩이 속에 발을 들여놓으면 손 안에서 개구리는 미끄러지고 왁자한 웃음소리, 첨벙거리는 물소리, 떠들썩한 아이들의 말소리들이 귓속을 파고들다가 곧 나 자신의 유년과 연결되는 꿈. 어릴 적 혼자 올라가곤 하던,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선 증산동 뒷산 중턱에서 어느 겨울날 오후에 발견한 삽 한 자루, 빨간 하이힐 한 짝, 손바닥만 한 개발자국들과 듬성듬성 떨어져 있는 붉은 핏방울들. 철이 들면서 나는 그 핏자국이 누구의 것이었을지 내내 궁금했다. 삽 주인의 것이었을까, 하이힐 주인의 것이었을까, 개의 것이었을까. 그 이후로 나는 혼자 하던 비밀스런 산행을 그만 두었던 것인데, 아직 겨울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던 눈 쌓인 증산동 뒷산의 어울리지 않는 소도구들은 산이 아니라 산에 남은 사람의 흔적이 가장 무섭다는 것을 각인시켜 준 상징으로 내게 남아 있다. 개구리 소년들의 죽음을 접한 이후로 나는 다시는 그 꿈을 꿀 수 없었다. 어쩌면 평행 우주의 다른 현실 속에서 아이들은 여전히 다 자라버린 나 대신 산 속 개울가에서 개구리를 잡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 세계에서 개구리 소년들의 죽음을 적나라하게 삽질하고 파헤친 뉴스는 꿈속에 유폐된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들의 유년을 파괴해버렸다.

박상수의 시집 <후르츠 캔디 버스>를 읽고 있으면 개구리 소년들이 죽기 전의 나날들을 접하는 느낌이 든다. 내가 환상화해서 추체험하던 가공된 개구리 소년들의 영원한 유년은, 실은 삽자루와 하이힐과 개발자국과 핏방울들을 보기 전의 나 자신의 유년이었을 것이다. 실로 이 시집에 가득 차 있는 시인의 유년에 대한 기억은 간혹 독자 자신의 것인지 시인의 고유한 경험인지 헛갈릴 만큼 생생하게 감각적인 현실로 경험되기 때문에 나는 이 시집을 ‘분석’해야 한다는 이 글의 임무가 하염없이 무겁게 느껴지고 마는 것이다. 분석하기에는 가슴이 너무도 먹먹해서 읽을 때마다 보편적 감성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고만 싶고, 그러니까 그저 읽어보면 왜 먹먹한지 알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해주고 싶고, 해설이나 분석 따위는 집어치우겠다고, 내가 이 시집에서 느낀 것들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은 광화문 네거리 이순신 동상 위에 올라가 이 시집을 찌라시처럼 뿌리는 것이라 말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시인의 기억을 독자가 충실히 느끼고 공감하는 것을 넘어서 점유해버린다는 것도 역시 월권이 틀림없으니, 이 글을 읽을 독자들을 대리하고 있는 다만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나는 혼자 보글보글 끓어 넘치려는 피를 잠시 조용히 잠재워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