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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는 세대론 같은 것을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나는 내 동갑내기들에 비해 시대에 좀 뒤떨어진 사람이다. 그렇다고 선배들과 어떤 경험을 공통적으로 실질적으로 정말로 구체적으로 총체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나에게는 지나치게 변화가 빠른 한국 사회에서 앞선 세대가 빠른 속도로 전력을 다해 수행한 세계 해석을 조금 이른 나이에 전력을 다해 (?) 받아들인 바람에 갑작스러운 사회 변화에 정신을 못 차렸던 문화적인 늦깎이의 일종 자괴감 같은 것이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왠지 모르지만 이 문화적이라는 말에 아직도 심한 양가감정을 느낀다.)

이를테면 만일 내게 나의 문학적인 자양분이라고나 할 만한 것을 이야기할 자격이 있다면, 그 시작은 주로 10대 시절에 탐독한 80년대의 (당대 패러다임으로 이른바 모더니즘 진영에 속한) 시와 소설과 평론들, 헌책방에서 찾아낸 프랑스 실존주의와 누보로망 작가들의 서늘한 책, 그리고 헤르만 헤세처럼 이성과 감각이라는 두 장의 미닫이 유리창 사이에 끼인 나비 같은 난감하고 괴로운 정신을 그리기 좋아했던 작가들의 작품들과 그 후예들이었다. 이 외국 작가들은 대략 콜린 윌슨이 광범위하게 아웃사이더라고 명명했던 자들과 겹친다. 97, 생애 첫 대선 투표권을 반납하고 잠깐 다른 나라에 요양을 가 있던 시기에 (그때 난 좀 미쳐 있었는데) ‘내 나라를 멜랑콜리하게 떠올리고 싶어질 때 펼쳐보려고 당시 모두가 열광하던 기형도 시집을 여행 가방에 넣어놓고 있기는 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생일이면 시집을 주고받으며 축하주를 밤새 거하게 마시는 인습이 있었는데, 기형도 시집은 단연 인기 품목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같은 시집이 세 권이나 있었다. 대륙 횡단 열차를 타고 23일간 덜컹거리며, 2등 칸에서 조치원같은 시를 읽고 있으면, 정말로 갑자기 내 나라가 무척 그리워지면서 창밖 풍경들이 모조리 노스탤지어를 자아내는 감성적인 효과가 있었지만, 친구들이나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쩐지 열광하게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두고 온 세계에 대해 견딜 수 없는 그리움을 자아내는 건 빌 에반스와 캐넌볼 애덜리의 앙상블이었다. 빠다 냄새나는 남의 나라 음악이 나를 향수로 이끌었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인데, 어쩌면 이것이 예술의 보편성을 입증하는 걸 거라고 나는 막연히 생각하고 있다.)

대학 시절에 동기들 중 소위 현역은 여섯 명 뿐이었고, 이 친구들은 대부분 학회나 학생회에 소극적으로 참가하거나 학교와 집을 오가는 모범생이었으므로, 10대에 80년대 한국문학의 정치성 세례를 스스로에게 베푼 나는 쉽사리 선배들의 표적이 되었고 나는 기꺼이 학습을 받아들였다.

물론 학생회는 거의 빈사 상태였다. 그런데도 얼추 96년쯤까지 내가 다니던 학교에는 정치조직이 난립했다. 우리는 소수 중에서도 소수였고, 나는 왜 우리가 소수인지 이해할 수 없었으며, 후일담 시나 소설의 판매 부수가 저렇게나 많은 건 무척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럴 정도로 나는 뒤떨어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취향은 이미 펑크나 그런지, 모던 락에 몰입해 있었고 문화 소비재가 되어가고 있는 혁명성의 이미지에 염증이 생기려고 했다. 곧 선배들은 왜 내가 빨갛지 않고 분홍인지검증하고 싶어 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써오라는 말의 의미를 잘못 알아들은 나는, 다음날 문화운동 제안서를 제출했다. 그러니 이건 정확히 말하자면, 내 세대의 이야기도 아니고 내 앞 세대의 이야기도 아니다. 20대 초반을 시간이 어긋난 상태에서 살고 있었던 어떤 섬망에 관한 이야기다.

 

시간이 어긋나 버렸다.” 이건 햄릿의 대사지만, 모든 미친 사람들은 저 말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건 누구나 가끔 돌아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지극히 주관적이었던, 젊어서 어리석었던 시절에 관해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말이다. 실제로 어긋나 버린 건 시간이었나, 햄릿이었나? 햄릿은 실제로 미쳤던 건 아니지만, 미친 척 하고 있는 것으로 미칠 지경을 견디고 있을 만큼은 미쳐 있었을 것이다. 오필리아를 사랑하면서. 성스럽게, 동시에 속물적으로. 오필리아를 울리면서. 아버지의 환영은 그토록 실제적이었던 것이다.

 

학부제와 IMF와 국민의 정부가 기계의 여신처럼 갑작스럽게 모든 것을 끝장냈다. 햄릿의 아버지의 대리인은 기간제 국왕이 되어 집안 단속에 나섰고, 숙부는 용서 받았으며, 오필리아는 노마드로 살겠다며 방랑자가 되었다. 호레이쇼들은 유학길에 올랐다. 98, 애증에 찬 80년대 시인의 새 시집이 오랜 기다림 끝에 나왔을 때, 나는 그걸 읽으며 이젠 정말 다 끝났다는 느낌 속에서 밤새 울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워서 얼굴이 익어버릴 것만 같다.

나는 이 섬망의 끝을 실제로는 알고 있지 않았을까? 현실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이 이상한 고뇌가 진즉에 내 것일 이유가 없었던 건 그렇다 치고 우선, 눈치 챘을 때 끝이 났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아무리 머리로 이렇게 되뇌어 봐도 98년의 그 시집이 피부에 남긴 감촉은 지나간 한 시절의 관 뚜껑에 대고 못을 박는 우렁찬 망치질처럼 구체적이고 둔중했다.

말이 나온 김에 말인데, 98년 이후에는 시를 읽으며 울어본 적이 없다. 그때까지 딱 두 번 그런 일이 있었는데 한 번은 92년이었고, 또 한 번이 98년이었다. 92년엔 시청 분수에 낭자하게 치솟는 눈보라를 바라보며, 해체되는 소비에트 연방을 연상하고는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고 있는 어느 시인의 시구 때문이었다. (?) 그게 환멸이었건, 일시에 긴장이 풀린 허망함이었건, 이제 대안이 없어졌다는 어마어마한 상실감 앞에서 나는 펑, 터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두 해가 모두 어떤 정권의 시작 직후이거나 시작(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교체)을 앞두고 있었다는 건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실제로는, 다 큰 어른이 초등학교 교실에서 시험 치는 꿈을 꾸는 것처럼, 당사자들로서는 이미 견디어낸 과거의 악몽을 나는 늦게 태어난 독자로서, 대리로 꾸고 있었다는 것일까? 그러면, 그때 이미 깨달았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럴 수 없었던 건, 내가 현실을 단지 배경으로 물려놓고, 선배 작가들이 쓴 작품들 속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10대에 읽은 80년대의 작품들이, 실은 출간된 지 몇 년 지난 근과거의 세계 해석이며, 세계가 지나치게 빨리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나는 단지 읽기만 했던 탓이다. 바야흐로 문민정부였는데, 소련은 중학교 졸업할 때 이미 망했는데, 문제는, 문학작품의 내적 현실성은 외부의 실제 시간성과 관계가 없다는 점이었다. 시는 시인과 시인이 살고 있는 세계의 무의식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지름길이므로, 읽어버린 이상은, 거기 손이 닿았던 이상은,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내가 읽어버린 세계였다. 읽어버리고 탐식하고 오랜 후에 잃어버려야 할 세계였다. 명명백백한 세계 인식의 실종에 대해 로티는 잘 잃어버린 세계라고 말해주었지만, 그리고 그 명명이 어느 정도 위안이 되기도 했지만, 애증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2004년엔가, 뒤늦게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읽으며 결말 부분에서 오열한 적이 있는데, 롤리타라는 살아서 걸어다니는 아름다움의 시간성이 불가피하게 사라져가는 것을 보는 험버트의 상실감이 또한 그렇게 찢어지도록 구체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정리해볼 수 있다면 정리해보자. 나는 사랑을 잃어버렸고, ‘사랑을 잃음을 거듭 상기해야 했었던 것이다. 그 세계는, 텍스트를 내가 샅샅이 핥고 있는 동안에는, 그 텍스트들의 살은, 결코 허상이 아니었다.

20대 중반 이후 10년 간 문학을 공부했지만, 애증과 불만족이 공허감과 함께 머릿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그런데 시집을 내고 나니 누군가는 나에게 포스트 미래파라는 이름표를 붙여주는 것이 아닌가. 올해 초엔가, 내 또래 어떤 칼럼니스트가 신문에 쓰기를, 요즘 젊은 세대70년대에 태어나 90년대 중반에 대학을 다녔던 나 같은 세대를 포삼 세대라고 부른다고 한다. ‘포스트 386 세대라는 뜻이다. ‘포스트 미래파포스트 386’, 90년대 초중반에 열병처럼 한국 문화계를 휩쓸었던 포스트모더니즘논쟁처럼, ‘포스트의 의미를 밝혀야 할까? 그것이 인지 인지 쪼개고 갈라서 접붙여야 하는 것일까? 사회구성체 논쟁도, 포스트모더니즘 논쟁도, 우리가 사는 지금-여기의 세계를 조금 더 나아지게 만들었다는 것이 정말 사실일까? 사구체 논쟁이 사회주의를 무너뜨린 것이 아닌 다음에야,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이 구제금융 위기를 불러온 것이 아닌 다음에야, 정밀하고 강고한 분류 체계를 만들수록 허망해진 사람들은 누구였나? 당사자들은 치열하게 고민하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고행을 수련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어떤 이들보다는 더 많은 경험치를, 또 다른 이들보다는 적은 경험치를 적어도 수량적으로는 지고 간다는 뜻이다. 그 절대적인 경험치가 비슷한 사람들을 우리는 몰아서 한 세대라고 부른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어떤 사람들의 경험은 그저 누적되지 않고 질적으로 그들 자신을 변화시킨다. 운이 좋다면, 말이다. 그 변화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가공할 모양새를 갖추기도 하는 것 같다.

(문학적) 세대론이라는 것이 정말로 가능할까? 나는 당분간 망설이지 않는 작품(사람)을 무턱대고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너무 빠른 전향도, 과거에의 고착도, 신이 죽었으니 이제 아무 거나 할 수 있다고 착각한 망나니 실존주의자처럼 반쯤 고의적인 망각도, 쉽사리 믿을 수가 없다. 특히 견딜 수 없는 건, 자신을 판관이라고 여기는 확신에 찬 선의 담지자들이다.

만일, 내가 어떤 집합의 원소이면서 동시에 그 집합의 바깥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내 세대를 논할 수 있다면, (이때 나는 참으로 많은 것을 누락해야 할 것이다) 나는 우리 세대가 80년대의 신경증으로부터 반동 형성된 우울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판치치는, 울증이 도덕적 무력에 대한 고백이라고 했는데, 우리 세대가 만일 울증에 빠져 있다면, 그건 앞서 도덕적 우월성으로 똘똘 뭉쳤던 강력한 비교 우위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80년대 시가 살부 충동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2천 년대 시는 가출한 엄마로부터 방치된 아이들의 공상으로 채워졌다고 말할 것이다. 살부 충동을 꿈꾸던 이 삼촌들은 마침내 자기 아버지 자리를 빼앗았는데, 민주적인삼촌들은 덜 절박해지니까 낯빛을 바꾸고는, 꼭 뭘 좀 물어보려 할 때마다 질문이 다 끝나기도 전에 조카들더러 네 맘대로 하라는 것이다. 자유와 무책임이 분간이 가지 않을 무렵, 슬슬 부아가 치밀지만 우리 세대(라는 것이 있긴 있다면)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집에 돌아가 일기를 좀 험하게 쓰는 정도라고 할 수 있을까. 혹은, 우리 세대(라는 것이 있다면)는 온갖 민주적인 (, 오늘날의 용법에 의하면, 합법적이고 교활하며 계산적인) 방식으로 꽉꽉 쥐어짜진 너덜너덜한 낡은 빨래 같은 자아를, 수치심 때문에 각색 누더기 천으로 덧대어 꿰맨 아플리케가 도달한 뜻밖의 쾌미(快美)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혹은, 바깥 없는 세계, 단일한 체제, 대안 없는 유일한 폐허에 있음을 알게 된, 정신만의 무정부주의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혹은, 우리 세대(라는 것이 정말로 있다면)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아직 모호하게 무한히 도착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도 아니라면, 우리 세대(라는 것이 도대체 있기라도 하다면)는 되다 만 보헤미안처럼 어딘가 덜떨어졌으며 쓸데없이 느긋한 데다 상품성과 미학을 가끔 헛갈리고 나르시시즘과 작가의식을 혼동하며 국민학교 도덕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윤리를 내팽개치거나 혹은 반대로 무기력을 숨기고자 정치 견해를 공공연히 드러내는 한편, 피상적이고 부박한 감수성 때문에 잃어버린 진정한서정성을 도시적인 나른한 분위기에서나 찾아다니는 속물이라고 억지 고해성사라도 해야 하는 걸까?

나는 사실 위로나 아래로나 어디까지가 나의 세대인지조차 모르고 있다. 텍스트를 내밀하게 핥아가며 읽고 있을 때는, 그것이 설령 기원전의 것이라도 나는 현실적인 시간성을 그만 잊어버릴 때가 종종 있고, 그럴 때면 감히 인류의 벗이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말이다. 내가 만일 우리 세대의 샘플이라는 점이 밝혀진다면, 그건 유의미한 일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분명한 건, 나는 내가 분명히 알 수 없는 우리 세대에 관해 어떤 확고한 언사를 섣불리 보일 수는 없지만, (그런 게 가능하다면 나는 거짓말쟁이 크레타인처럼 보편적 예외가 되거나 위선자가 되겠지) IMF 이전에 청년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지금보다는 아름다운 세계가 있었다는 회고적 진실에 대체로 동의할 거라는 점이다. 상대평가가 없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렇다. 스펙 따위는 아직 옵션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렇다. 온갖 포스트가 아직은 오직 예감으로만 수군대던, 그래서 우리에게 아직 영혼이 붙어 있었던 세계. 아무도 영혼을 의심하지 않았던 그 세계. 단지 제스처로라도 반항할 수 있었던 세계. 풍요가 그렇게 빨리 지나갈 줄 알았다면 80년대 한국문학의 미망에 사로잡히는 대신, 아직 아트 시네마텍이 있던 대학로에서 종로까지, 그리고 거기서 가을에 은행잎이 끝내줬던 광화문 네거리까지 질리도록 쏘다니기나 할 걸 그랬다. 어차피 영혼이라도 팔아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만일, 이런 환상화가 ‘5공 때는 노숙자들이 없어서 좋았다거나 유신 시절의 눈부신 새마을 운동의 치적을 영광에 찬 눈으로 기억하는 다른 세대 사람들의 환상화와 기본적으로 같은 프로세스를 거친 것이라면?

오늘에 관해서는 이쯤에서 입을 다물자. 우리 세대(라는 것이 있다면)는 무척 예의가 바르니까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쪼록 인류의 벗이 되어가기로 하자. 각자의 비밀을 지니고, 온힘을 다해 서로에게 도착하고 있기로 하자. (끝)

-<문학과사회> 2016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