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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들

학원 가기 싫은 날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한국에는 두 가지 유형의 모자관계가 있는데, 첫 번째는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시는 유형이고 두 번째는 '학원 가기 싫은 날 엄마를 이렇게 저렇게 먹는' 유형이다. 아, 아니구나. 이 두 가지는 같은 유형인지도 모르겠다. 저 논란 속의 '동시'는 예술성의 수위 문제 이전에(여기에 관해 논하려면 시보다 훨씬 영향력 있는 영상물의 등급 심의에 관해 먼저 논하는 게 현실적일 것이다), 가학-피학적인 한국적 모자관계의 역학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나는 생각난다고 다 쓰는 걸 예술성의 핵심이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쓰여진 표현이 오직 금기 파괴적이어서 예술적으로 호평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기 싫은 것을 강제하거나 굴욕감을 주는 부모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아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아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부모만큼이나 흔하디 흔하다. 사람들은 그것을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비밀스럽고 단지 순간적인 소원이 정말로 이루어질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것은 말의 힘을 믿기 때문이고, 말의 힘을 믿는 동안 그걸 믿는 사람은 말이 단지 말에 그치지 않는 세계에 살고 있다.

내게 문제적으로 생각되는 것은 그것이 표현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하지 않는 표현을 했다는 이유로 예술적으로 인정하는 수용자들의 태도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말의 힘을 믿지 않고 있다. 단지 금기파괴적인 표현이, 실행되지 않고 작품의 레테르를 달고 있어서 예술적이라고? 예술과 범죄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어제 총기를 난사한 예비군의 유서는, 그 내용이 실행되었기 때문에 예술작품이 아닌 건가? 이토록 삶과 예술을 분리하면서 그 시가 현실 비판적인 함의를 담고 있다고?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시를 쓰는 이유 중의 하나가, 혼자 일기에 쓸법한 폭언이나 극언 같은 배설의 쾌감에 중독되는 일로부터 자신을 구원하는 한 안간힘이기도 하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이상하게 여기는 건 그 친구가 그 시를 써서 엄마에게 (망설임 없이, 혹은 약간의 망설임과 함께, 혹은 하하 웃고 너스레를 떨면서) 보여주기까지의 심리적 움직임, 또 그 시를 본 엄마가 자기를 먹는 시를 쓴 자기 딸의 시를 '쿨하게' 읽고서 어쩜, 내가 너무 심했었구나,라며 학원을 끊게 하고 아이가 하고 싶어하던 복싱을 시켜주면서 '이건 꼭 시집에 넣자'고 함께 웃으며 합의했을 장면을 자연스럽게 상상하고 있는 듯한 SNS 상의 분위기다. 그렇게 소통이 원활한 집안에서 학원 가기 싫다는 걸 말로 안 하고 굳이 카니발리즘적인 시로 써서 그 시 속의 피학자인, 현실에서는 친구 같은 엄마에게 보여줬다고? 이런 장면이 하나도 행복해보이지 않는 건 나뿐인가? 그러고 보니 이 시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예비군의 유서처럼 충분히 실행된 셈이 아닌가?

다소 결이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살부의식의 시대를 살았던 아들 딸 들이 부모가 되었을 때 반동 형성을 통해 어떤 부모의 모습을 갖추어가는지 관찰하는 건 흥미로운 일일 것 같다. 학원 가기 싫은 날을 둘러싼 논란은 예술성 논란의 옷을 입고 있지만, 실은 도덕적 우월을 지속적으로 점하기 위해 마조히즘적 주체가 되는 심리적 메커니즘에 관한 단적인 사례라면 지나칠까? 이쪽이든 저쪽이든 사람들의 지나치게 단순한 반응도 놀라울 뿐이다.

"때로 시가cigar는 시가cigar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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